▲ 김슬옹 세종대 겸임교수
올해는 미국인으로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한글 발전에 아주 큰 공을 세운 헐버트(Hulbert, H. B.) 박사 탄신 150주년이고, 그가 한국에서 서거한 지는 64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1월 26일이 탄신 기념일이었고 그가 묻혀 있는 서울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 묘소에서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회장·김동진) 주최로 조촐하게 기념식이 열렸다. 사실 우리 국민 모두가 이 날을 기려야 하는데 대다수 국민이 제대로 모르기조차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히 국가보훈처가 헐버트 박사를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올해 7월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886년 육영공원 교사로 입국
알파벳보다 뛰어난 문자에 충격
3년간 한글과 한국어 배운끝에
한글전용 교과서 '사민필지' 펴내
1892년 한글의 우수성·과학성
학술차원 논설통해 세계에 알려


헐버트는 미국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나이인 1886년에 고종의 초청으로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에 왔다. 기울어가는 극동의 작은 나라에 온 이 푸른 눈의 젊은 외국인으로 하여금 온 몸을 바쳐 한국을 위해 일하고 싸우게 한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새삼 궁금해진다. 여러 동기가 있었겠지만 가장 큰 동기는 한글의 힘이었을 것이다.

이미 강대국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있는 작은 나라에 영어 알파벳보다 더 과학적인 우수한 문자가 있다는 사실에 그는 놀랐고 그러한 놀라운 문자를 지배층과 지식인이 제대로 쓰지 않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소통이 중요한 교육을 위한 각종 책이 한문이거나 한자 중심이라는 사실이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19세기 후반에는 한글 소설이 널리 퍼지는 등 꽤 한글이 힘을 얻고 있었지만 나라 전체로 보면 훈민정음, 곧 한글은 철저히 비주류 문자일 뿐이었다. 18세기의 박제가, 박지원, 정약용 같은 실학자들조차 한글을 철저히 외면한 반한글 역사가 19세기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헐버트는 개인교수를 통해 3년간 한글과 한국어를 온몸으로 배운 끝에, 조선에 온 지 4년만인 1890년(고종 27년) 스스로 한글전용 인문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펴내게 된다. 우리 스스로 한글 전용 교과서를 낼 깜냥을 내지 못하던 시기에 외국인이 먼저 이런 교과서를 낸 것이다.

헐버트는 '사민필지' 서문에서 "중국 글자로는 모든 사람이 빨리 알 수도 없고 널리 볼 수도 없는데 조선 언문은 본국의 글일 뿐더러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널리 보고 알기 쉽다.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하여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못하고 업신여기니 어찌 아깝지 아니하리오"라고 하며 당시 조선의 현실을 개탄하였다.

이 책이 나온 지 4년이 지난 1894년에 비로소 한글을 주류 문자로 인정한 고종의 국문(한글) 칙령이 나왔지만 조선과 고종은 외국인 충고를 따르지 못하고 국한문 혼용으로 시대적 타협을 꾀했다. 1895년 오늘날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홍범 14조가 한글로 나왔지만 한문, 국한문 혼용과 나란히 병기 형태로 나온 것이다. 다행히 1896년 독립신문이 한글만으로 나온 것은 헐버트의 힘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민필지'를 펴낸 지 2년 후인 1892년에는 그는 학술 차원에서 한글의 우수성을 'The Korean Alphabet Ⅱ'란 논설로 세계에 알린다. 헐버트는 이 글에서 "문자사에서 한글보다 더 간단하게 더 과학적으로 발명된 문자는 없다"라고 평가하였다.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의 실체를 해외에 제대로 소개한 셈이다.

세종대왕은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을 가장 큰 목표로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책을 통한 지식 나눔으로 이어지지 않는 문자는 진정한 문자가 아니다. 정약용이 집필한 500권이 넘는 책이 위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나 제대로 소통할 수 없는 한문으로 되어 있었기에 그것이 담은 진정한 실용과 삶의 지식 또한 사회 변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조선의 사대부 관료들은 한글전용 '사민필지'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지는 못하고, 1895년 이 책을 오히려 국한문 혼용체로 바꿔 역사를 되돌려 놓았다.

올해 한글 탄생지인 서울 경복궁 근처에 헐버트 동상이 세워질 예정이라고 한다. 외국인 동상이라 한류와 세계화 시대의 한글의 의미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배재학당에서 가르치고 독립신문 발간에도 같이 관여한 주시경 선생 동상과 더불어 세워진다고 하니 더욱 의미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