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윤태호 <미생> (1-9), 위즈덤하우스

2012년 1월 20일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연재를 시작해 2013년 7월 19일 145수로 마무리되었다. 2012년 9월 15일 1권이 출간되어 2013년 10월 5일 9권으로 완간되었다. 웹툰 누적 조회수는 수억뷰를 넘었고, 단행본은 50만부를 훌쩍 넘어섰다. 2012년 오늘의 우리만화상(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2012년 대한민국콘텐츠대상(대통령상), 그리고 2013년 대한민국 국회대상 올해의 만화상을 수상했다. 윤태호의 <미생> 이다.

<미생> 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장그래는 프로바둑기사를 꿈꾸다 입단에 실패한 뒤 아는 분의 소개로 종합상사 원 인터내셔널의 인턴이 된다. 보통의 만화라면 주인공 장그래가 자신의 장기를 살려 위기에 빠진 회사를 구하고 정규직이 되고, 승진도 하는 이야기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장기연재에 들어가면 그래 차장, 그래 부장, 그래 이사, 그래 사장까지 시리즈가 계속될 수도 있다. (1982년 연재를 시작한 일본만화 <시마과장> 은 <시마회장> 까지 시리즈가 계속되고 이있다.) 회사배경의 영웅서사는 지친 독자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주겠지만, 상처를 어루만질 수는 없다. 영웅서사를 뺀 장그래의 성장 스토리라면는 어땠을까? 바둑의 실패를 딛고 직장생활에서는 성공한다? 영웅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미생> 은 장그래의 성공이나 성장이 아니라 장그래가 들어간 대기업, 그 안의 팀, 팀 안의 팀원들의 일상을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그래서 성공이나 성장을 다룬 만화라면 다루지 않을 일상적인 사무실 업무 장면이 <미생> 에서는 곧잘 등장한다. 서류를 뒤지고, 엑셀로 데이터를 정리하며, KOTRA 사이트에 들어가 자료를 찾고, 해외 지사에 전화를 해 현지 자료를 협조받는다. 사내 프레젠테이션의 성공을 치밀한 예행연습과 사전 준비가 뛰따른다. 심지어 참여할 중역들의 취향을 귀동냥으로 알아내기도 한다. 이렇게 고생한 신규 프로젝트가 사내 정치에 의해 무산되면, 야심한 시간 회사 근처 곱창집을 찾아 소주를 붓는다.

윤태호 작가의 말 대로 <미생> 은 "무수한 샐러리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을 마치 핀셋으로 끄집어내듯 보여"줄 뿐이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1%가 아닌 99% 다수의 가치가 수면 위로 발현"된다. 과장된 성공과 폭풍감동의 성장 대신 직장의 평범한 일상을 담았다. 하지만 직장의 일상이란건 긴장의 연속. 마치 하루하루가 전투 같다. 그게 대한민국의 평범함이다.

비정규직 낙하산 장그래는 인턴을 거쳐 비정규직으로 채용된다. 기적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에게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계약 기간이 끝나고, 회사를 나온 장그래. 그의 마음을 뜨겁게 했던 회사 건물을 다시 올려다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미 그것은 언제 내 것이었냐는 듯, 차가워져 있었다. 내 인프라는 나 자신이었다.'

끝끝내 프로기사가 되지 못한 장그래. 겨우 검정고시를 거친 고졸자격으로 회사에 들어간 그는 철저히 주변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료와 선배들을 통해 직장인 장그래가 된다. 프로 입문에 실패한 한국기원 연구생에서 계약직이지만 직장인 장그래로 생활하게 된 그는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바둑이 있다"고 말한다. 장그래의 나레이션을 조금 바꿔보자.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노동이 있다.

직장에 들어와 드디어 자신의 바둑을 인정하는 장그래를 통해 우리는 자기의 노동을 돌아본다. 대기업에 있건, 중소기업에 있건,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노동이 있다. 당신의 노동이 세상의 중심이다. 당신의 노동으로 세상이 움직인다.

단행본에는 수록되어있지 않지만, 다음 만화속세상의 연재 페이지를 보면 요르단 취재여행 후기만화가 나온다. 후기만화에서 작가는 30년 전 요르단에 근로자로 다녀오신 아버지의 사진을 챙겨가 그곳을 방문하는 미션을 수행했다고 밝힌다. 아버지가 30년 전에 섰던 그 자리에 아들이 서서 사진을 찍은 모습은 진실되고, 아름다웠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