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인하 청강대 교수
설 연휴가 시작되기 바로 전 VOD로 '그래비티'를 봤다. 아내와 아이들은 영 내켜하지 않았지만 극장에서 3D 아이맥스로 본 여운이 아련해, 이건 꼭 봐야한다고 우겨 세 여성과 함께 우주쇼를 즐겼다. "재미있었어?" 내 질문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설 연휴가 되고 EBS에서 방영한 '스타워즈' 전편을 보려하니, 너무하다는 원망이 쏟아졌다. 연휴를 SF로 화려하게 보내려 했던 내 계획은 조금 수정해야 했다.

마침 2013년 연말에 출간된 '거인들의 전설'이 눈에 들어왔다. '2001스페이스 판타지아', '스타더스트 메모리즈', '멸망한 짐승들의 바다' 등의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일본 SF의 거장 호시노 유키노부의 단편 모음집이다. '21세기 SF 명작들을 예견한 20세기의 만화!! 총 세 편의 단편이 이루어내는 완벽한 유기적 결합!!'이라는 홍보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거인들의 전설'을 보면 놀랍게도 '그래비티'가 겹쳐진다. 특히 마지막 엔딩 부분은 판에 박은듯 동일하다. 하지만 두 작품은 전혀 다른 방향의 작품이다. 1977년도 일본의 만화잡지 '소년점프'에 연재된 '거인들의 전설'은 6만년 전 전설속에만 존재하는 거인족인 '타이탄'족을 불러낸다. 어린 시절 월간 잡지의 기사에서 보았음직한 남극의 거대 구멍(대지축공)과 새로운 빙하기도 등장한다. 이 모든 요소는 낯설지 않다. 그런데 만화는 익숙한 70년대적 설정에서 멈추지 않는다. 지구 빙하기라는 위기에 직면한 그들은 우주로 눈을 돌린다.

일본 에도시대 최고 학문기관인 쇼헤이코의 최고 책임자를 역임한 일본의 대표적인 유학자 사토 잇사이(佐藤一齊)는 '언지록(言志錄)'에서 "시점을 이동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인다"고 말했다. SF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시점을 선사한다. 우주와 시공간을 넘나드는 시점의 이동은 보이지않는 것을 보이도록 한다. 나에게 SF는 시점의 이동을 통해 지금, 이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장르다.

가장 짧게 정의하는 나의 SF는 '인간을 보여주는 장르'다. 광대한 우주가 되었건, 디스토피아의 미래가 되었건, 시간여행이 되었건 간에 한번 붙잡고 놓을 수 없게 만든 SF의 매력은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이야기'다. 우리는 2013년 '그래비티'가 보여준 광대한 우주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싸우는 스톤 박사의 투쟁에 감동의 박수를 보냈다. '거인들의 전설'도 우주에서 펼쳐지는 인류의 감동을 다룬 만화다. 매체는 다르지만 '그래비티'와 같은 거대한 우주의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먹고 사는 문제는 늘 우리 발목을 잡는다. 이 갑갑한 세상에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새해가 되었다고 뭐가 그리 달라질 것인가만, 그래도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어야 한다는 걸, '거인들의 전설'은 시공과 우주를 넘나들며 이야기한다. 20세기에 태어나 조금은 낡아 보이지만,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보다 더 진실한 인간다움을 담고 있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인간다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 시대에 '거인들의 전설'을 권한다.

/박인하 청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