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광주, 청계천서 쫓겨온 주민 5천명 배고픔·분노에 방화
66년 영양실조로 사망·수십여명 사표 등 교사 박봉 ‘이슈화’
머리카락 팔아 시아버지 회갑상 차린 며느리 이야기 ‘뭉클’
신문은 사회상을 반영한다. 굵직한 사건뿐 아니라 사회 밑바닥의 세세한 흐름을 신문에서 읽을 수 있다. 대중일보를 읽으면 해방기 인천의 풍경과 미군의 모습이 생생하다. 혼란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벌이에만 골몰하던 ‘모리배’의 행태를 고발하는 것도 대중일보의 역할이었다.
압축 성장이 이뤄지던 1960~1980년대 경인일보가 기록한 기사들은 압축성장기 경기도·인천 사회사(社會史)의 사료가 되기에 충분하다.
#‘인중·제고와 함께 그 이름 길이 빛나리…’
1961년 9월 30일 2면 톱 기사는 인천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 길영희 교장의 정년 퇴임 소식을 전했다. ‘무감독 시험 운영’, ‘부정 입학, 정실 입학 불허’로 유명한, 존경받는 교육자였다.
길 교장은 “갈 때가 되면 가는 것이 인간”이라며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사양했다. 기사 속 사진의 길 교장은 ‘제물포고등학교 교장 길영희’라는 명찰을 부착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50년 전의 ‘세월호 사건’
1963년 10월 11일 오후 2시40분. 흥안국민학교 학생, 교사, 학부형 137명이 탄 배가 남한강 한복판에서 뒤집어졌다. 여주 신륵사 소풍을 마치고 돌아오던 배의 전복 사고로 국민학생 37명을 포함한 49명이 익사했다. 정원을 초과해 배를 태운 게 화근이었다.
기사 속 오열하는 부모들의 모습을 읽으면 마음이 아프다. 경찰은 기관사와 인솔교사 등 5명을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긴급 구속했다.
#머리카락을 잘라 시아버지 회갑상을 차렸다고?
37년간 길러 온 머리카락을 판 돈으로 시아버지 회갑상을 차린 며느리의 이야기는 낯설다. 1966년 5월 29일치 기사는 “가족 몰래 자신의 머리칼을 4백원에 팔아 쇠고기 반근과 술 한 병을 사들고 와 쌀밥을 공양한 갸륵한 며느리” 남궁복순(37)씨의 사연을 소개했다.
막노동을 하는 남편의 하루벌이(40원)의 10배인 400원으로 이웃 노인들을 불러 시아버지 회갑잔치를 치렀다. 정작 이 며느리가 평생 쌀밥 한 끼 먹어보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은 양주군청 공무원은 남궁씨에게 쌀 한 말을 전달했다.
#영양실조, 박봉에 시달린 교단
1966년 8월 26일자 3면은 <‘굶주린 師道’ 지다>는 기사는 안타까움을 준다. 평택중앙국민학교 4학년 담임교사 권병길(46)씨가 체육대회 중 갑자기 쓰러져 숨졌는데, 원인이 영양실조였다.
“직계 가족 9식구를 거느리고 빈곤한 생활을 해왔으며 박봉 생활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굶어서 출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권 교사의 갑작스런 죽음에 동료들은 무척 슬퍼했다. 같은 해 11월 10일자 3면 톱 기사 제목은 <배고파 못하겠다-박봉을 원망, 스스로 교직을 물러나>였다.
1966년 1~10월 인천시에서 사표를 낸 교사는 27명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박봉으로 빨리 직업을 바꾸지 않으면 자녀들의 교육은커녕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대한교련공제조합에서 주는 2, 3만원의 퇴직보험으로 구멍가게나 차리고 살면 이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서울~인천·수원 10분대 진입 시대
1968년 12월 21일자 1면은 경인·경수고속도로 개통 기사가 개통식에 온 대통령 사진과 함께 큼지막하게 실렸다. 이 도로가 뚫리면서 서울~인천 간 이동 시간이 18분, 서울~수원 간은 13분으로 단축됐다.
도로 개통 기사에 시멘트, 철근, 아스팔트 등 주요 자재 사용량과 투입 인원·중장비 규모가 세세하게 소개된 것이 지금과 다른 특징이다. 통행료는 지프차 100원, 코로나 150원, 대형차 200~500원이었다.
#배가 고파 못 살겠다
1971년 8월 10일 오전 10시 광주군 중부면에서 주민 5천여명이 파출소와 경찰차에 불을 지르는 등 ‘난동’을 부렸다. 이들은 1969년 청계천에서 쫓겨난 빈민들이었다. 1970년 12월 기준 광주 대단지에 이주한 1만7천341세대(8만6천705명) 중 7천832세대(3만9천160명)가 판잣집 등에 거주했다.
도로·전기·수도 등이 제대로 돼 있지 않은 황무지였다. 이들 주민은 서울시가 약속과 달리 땅을 무상이 아닌 유상으로 불하하고 가옥에 세금을 매기겠다고 발표한 것에 분노했다. 서울시는 즉각 수습 대책을 마련해 주민들은 안정시켰다. 광주대단지는 1973년 성남시로 승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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