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기사로 본 한국현대사(1960~1980년대)
1968년 12월 개통된 서울~수원간 경수고속도로.24.8㎞의 이 도로 완공으로 서울~수원간을 13분만에 주파할 수 있게 됐다.(사진 왼쪽)1963년 10월 여주 익사 사고가 보도된 신문. 소풍을 마치고 학생, 교사 등 137명을 태우고 돌아오던 배가 남한강 한복판에서 전복되면서 국민학생(현 초등생) 등 49명이 익사했다. /경인일보 DB·아이클릭아트

71년 광주, 청계천서 쫓겨온 주민 5천명 배고픔·분노에 방화
66년 영양실조로 사망·수십여명 사표 등 교사 박봉 ‘이슈화’
머리카락 팔아 시아버지 회갑상 차린 며느리 이야기 ‘뭉클’


신문은 사회상을 반영한다. 굵직한 사건뿐 아니라 사회 밑바닥의 세세한 흐름을 신문에서 읽을 수 있다. 대중일보를 읽으면 해방기 인천의 풍경과 미군의 모습이 생생하다. 혼란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벌이에만 골몰하던 ‘모리배’의 행태를 고발하는 것도 대중일보의 역할이었다.

압축 성장이 이뤄지던 1960~1980년대 경인일보가 기록한 기사들은 압축성장기 경기도·인천 사회사(社會史)의 사료가 되기에 충분하다.

#‘인중·제고와 함께 그 이름 길이 빛나리…’

1961년 9월 30일 2면 톱 기사는 인천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 길영희 교장의 정년 퇴임 소식을 전했다. ‘무감독 시험 운영’, ‘부정 입학, 정실 입학 불허’로 유명한, 존경받는 교육자였다.

길 교장은 “갈 때가 되면 가는 것이 인간”이라며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사양했다. 기사 속 사진의 길 교장은 ‘제물포고등학교 교장 길영희’라는 명찰을 부착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50년 전의 ‘세월호 사건’

1963년 10월 11일 오후 2시40분. 흥안국민학교 학생, 교사, 학부형 137명이 탄 배가 남한강 한복판에서 뒤집어졌다. 여주 신륵사 소풍을 마치고 돌아오던 배의 전복 사고로 국민학생 37명을 포함한 49명이 익사했다. 정원을 초과해 배를 태운 게 화근이었다.

기사 속 오열하는 부모들의 모습을 읽으면 마음이 아프다. 경찰은 기관사와 인솔교사 등 5명을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긴급 구속했다.

납활자 주조기
납활자를 사용해 신문을 제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진은 납활자 주조기.

#머리카락을 잘라 시아버지 회갑상을 차렸다고?

37년간 길러 온 머리카락을 판 돈으로 시아버지 회갑상을 차린 며느리의 이야기는 낯설다. 1966년 5월 29일치 기사는 “가족 몰래 자신의 머리칼을 4백원에 팔아 쇠고기 반근과 술 한 병을 사들고 와 쌀밥을 공양한 갸륵한 며느리” 남궁복순(37)씨의 사연을 소개했다.

막노동을 하는 남편의 하루벌이(40원)의 10배인 400원으로 이웃 노인들을 불러 시아버지 회갑잔치를 치렀다. 정작 이 며느리가 평생 쌀밥 한 끼 먹어보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은 양주군청 공무원은 남궁씨에게 쌀 한 말을 전달했다.

#영양실조, 박봉에 시달린 교단

1966년 8월 26일자 3면은 <‘굶주린 師道’ 지다>는 기사는 안타까움을 준다. 평택중앙국민학교 4학년 담임교사 권병길(46)씨가 체육대회 중 갑자기 쓰러져 숨졌는데, 원인이 영양실조였다.

“직계 가족 9식구를 거느리고 빈곤한 생활을 해왔으며 박봉 생활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굶어서 출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권 교사의 갑작스런 죽음에 동료들은 무척 슬퍼했다. 같은 해 11월 10일자 3면 톱 기사 제목은 <배고파 못하겠다-박봉을 원망, 스스로 교직을 물러나>였다.

1966년 1~10월 인천시에서 사표를 낸 교사는 27명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박봉으로 빨리 직업을 바꾸지 않으면 자녀들의 교육은커녕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대한교련공제조합에서 주는 2, 3만원의 퇴직보험으로 구멍가게나 차리고 살면 이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3 인천직할시 개청7
1971년 광주군 중부면에서 발생된 주민 5천여명 난동 모습.

#서울~인천·수원 10분대 진입 시대


1968년 12월 21일자 1면은 경인·경수고속도로 개통 기사가 개통식에 온 대통령 사진과 함께 큼지막하게 실렸다. 이 도로가 뚫리면서 서울~인천 간 이동 시간이 18분, 서울~수원 간은 13분으로 단축됐다.

도로 개통 기사에 시멘트, 철근, 아스팔트 등 주요 자재 사용량과 투입 인원·중장비 규모가 세세하게 소개된 것이 지금과 다른 특징이다. 통행료는 지프차 100원, 코로나 150원, 대형차 200~500원이었다.

#배가 고파 못 살겠다

1971년 8월 10일 오전 10시 광주군 중부면에서 주민 5천여명이 파출소와 경찰차에 불을 지르는 등 ‘난동’을 부렸다. 이들은 1969년 청계천에서 쫓겨난 빈민들이었다. 1970년 12월 기준 광주 대단지에 이주한 1만7천341세대(8만6천705명) 중 7천832세대(3만9천160명)가 판잣집 등에 거주했다.

도로·전기·수도 등이 제대로 돼 있지 않은 황무지였다. 이들 주민은 서울시가 약속과 달리 땅을 무상이 아닌 유상으로 불하하고 가옥에 세금을 매기겠다고 발표한 것에 분노했다. 서울시는 즉각 수습 대책을 마련해 주민들은 안정시켰다. 광주대단지는 1973년 성남시로 승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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