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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임진산성에서 발견된 현자총통(玄字銃筒). 임진왜란 당시 ‘용인전투’에서 우리 관군이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같은 우수한 화포가 있었기에 이순신의 승전도 가능했다. /경기문화재단 제공

임진왜란때 용인서 완패한 관군
칼·창·화살촉과 함께 대량 묻혀
아파트 건설 공사중 우연히 발견
당시 쓰인 전통무기 최초로 발굴

1592년 6월 임진왜란 당시 전라·경상·충청, 즉 하삼도의 관찰사들은 여기저기 관군을 모집해 ‘서울 수복’을 목표로 북상한다.

이 때 용인지역에는 일본 수군장수 와키사카(脇坂安治) 휘하의 1천6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수적 우세를 믿은 조선군은 별다른 전략도 없이 왜군을 몰아붙였으나 왜군의 기습전에 제대로 싸움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완패한다.

이 전투를 ‘용인전투’라 하고, 이 때 하삼도의 관군을 ‘삼도근왕병(三道勤王兵)’이라 한다.

당시 대군의 죽음으로 현재 용인 수지구를 흐르는 풍덕천이 핏물로 변했다고 전해진다.

1997년 지금의 수지구청 맞은 편에 삼성 래미안 아파트 건설공사가 진행됐다. 해당 부지에는 임진산성이 포함돼 있는데, 산성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지표조사 수행 기관은 별다른 조치 없이 공사를 허락했다.

본격적인 절토에 앞서 수목 이식 작업을 하는데, 중장비가 떠올린 흙 속에 묻혀 있던 총통(銃筒)이 발견된다. 앞서 ‘거북선 가짜 총통 사건’이 매스컴에 오르내린 덕분에 조선시대 총통의 기본 형태는 잘 알려져 있었다.

1997년 5월 1일 경기도박물관에 총통 발견 사실이 접수됐고, 그해 6월 4일 긴급발굴조사에 착수했다. 발굴 결과 총통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으나, 당시 조선군의 무기로 볼 수 있는 칼·창·화살촉 등이 다수 출토됐고 흙을 다져서 만든 토루(土壘)도 발견됐다.

당시로서는 임진왜란 당시의 총통을 비롯해 전통무기들이 처음으로 발굴됐고, 용인전투에 대한 실증자료가 확보돼 학계의 관심이 집중됐다.

당시 발견된 총통은 ‘현자총통(玄字銃筒)’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크기를 정할 때 ‘천자문’을 따라 천·지·현·황 순서로 이름을 붙였다. 따라서 현자총통은 조선 총통 중 세 번째로 큰 것이었다.

세상의 이목을 끄는 발굴 유적 중 상당수는 정식 지표조사가 아닌, 우연한 발견과 그에 따른 신고로 세상에 알려진다. 주꾸미 빨판에 붙어 올라 온 청자 한 점이 1208년에 난파한 고려선박과 그 배에 선적했던 귀중한 고려시대 유물을 발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연한 기회로 땅이나 물 속에서 유물을 발견하게 되면 ‘진품명품’에 들고 가지 말고, 자신이 살고 있는 구청이나 시청으로 달려가 7일 내에 신고하길 바란다.

방송국으로 가면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것이고, 발견 신고를 하면 보상금은 물론 운수대박일 경우 최대 1억원의 포상금도 받을 수 있다.
경기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