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산림남벌 막으려 조합 조직
극빈자 고용 순찰 광복까지 활동
수도권 유일 70~90년생 노송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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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림조합비(禁林組合碑) /경기문화재단 제공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을 포함한 숱한 역사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자 삼국시대 이래의 문화유산이 집중돼 있는 공간이다.

이런 역사문화적 가치와 더불어 자연생태도 빼어나며, 산 정상부가 평탄하고 넓어 수백 년 동안 광주의 읍치(邑治)가 자리했던 곳이다. 이외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만한 사유가 남한산성에 또 있으니 바로 ‘남한산성 소나무숲’이다.

1846년에 편찬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산림의 훼손이 심하다고 기록돼 있다. 또 1907년 무렵 촬영된 사진에는 성내 산림에서 줄기의 가슴높이 지름이 30㎝ 이상인 대경목(大徑木)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 2015년 현재 남한산성 수어장대 일대에는 70~90년생 소나무 숲이 72ha나 펼쳐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런 대단위 노송군락은 서울·경기지역에서 단연 남한산성 소나무숲이 유일하다. 이런 소나무숲을 솔바람 맞으면서 호젓한 기분으로 산책하는 기쁨은 남한산성 탐방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되고 있다.

남한산성 소나무 숲길은 행궁에서 수어장대로 이르는 산책로를 따라 조성돼 있는데, 그 초입에 단출하기 그지없는 비석 2기가 서 있다.

일명 ‘금림조합비(禁林組合碑)’라는 이 석비는 해방 전부터 산성리 주민들이 스스로 성안의 소나무를 지키고 벌목을 방지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조합을 결성하고 성내의 노송군락을 지켜온 것을 기념해 세운 비석이다. 비문은 금림조합장 석동균과 이영래의 덕을 기리고 있는데, 1934년 도감독(都監督) 이순영 외 37인이 세운 것으로 돼 있다.

일제는 전쟁 물자를 확보하고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산림을 남벌했고, 남한산성 성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산성마을 주민 303명이 국유림을 불하받은 후 벌채를 막기 위해 금림조합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1927년부터 광복 때까지 소나무를 보호해 왔다고 한다.

1929년 3월 23일 동아일보에 ‘남한산금림조합기념’이란 기사에는 “산성리 유지 30명으로 남한산 금림조합을 조직하야 조합원 일동이 매회 월 이백원씩을 집합(集合)하여 빈민구제 사업으로 남한산성에서 산림보호를 목적하야 산감(山監) 50명을 극빈자로 뽑아 매일 산감 6인씩을 교대로 남한산을 매일 오륙 차례 순찰케 하였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어 당시 금림조합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문화자산을 가꾸고 지키는 데 있어서, 관(官) 주도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문화유산의 생명력은 짧을 수밖에 없다. 생태자원 보호와 문화유산 활용에 지역민과 시민단체의 역할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것도 세계적인 추세다.

이런 의미에서 ‘금림조합’의 활동은 우리에게 무언의 교시를 하고 있는 듯하다. 경기도 문화유산 정책의 수립과 추진에 ‘도민의 참여’가 어떠했는지 되돌아보라고 ‘금림조합비’는 우리에게 일갈하고 있다.

경기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