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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옹진반도·연안도서 무력충돌 빈번 ‘한국전쟁 전초전’
1·4후퇴후 군번·계급없는 비정규군 ‘동키부대’ 창설
고향수복 의지로 혁혁한 전공… 서해 5도 차지 밑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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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미군 특수전사령부(SOCOM) 역사관은 미군 특수부대의 전신 중 하나로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산하에 있던 ‘8240부대’(유엔유격군·UN Partisan Forces-Korea)를 소개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백령도 등 서해도서와 북한 옹진반도 등을 중심으로 활약한 8240부대의 구성원은 주로 이 지역 출신 한국인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로 만들어진 부대가 어떻게 미군 특수부대의 ‘모체’가 될 수 있었을까.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가 38도선에 의해 분단되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휴전선과 해상 북방한계선(NLL)이 설정되기까지 옹진반도와 서해도서는 격전지이자 요충지가 아닌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천 섬에서는 한국전쟁의 또 다른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옹진전투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남북 간 무력충돌은 있었다. 특히 남북 접경지역이던 황해도 옹진반도와 그 연안도서에서 빈번했다. 한국전쟁의 전초전이 치러진 것이다.

북한군은 1949년 5월 21일 새벽, 병력 200여 명을 이끌고 옹진반도 두락산에 있는 한국군 진지를 공격했다. 이날부터 6월 29일까지 수천 명의 병력이 서로 옹진반도 땅을 뺏거나 빼앗기는 교전을 거듭했다. 같은 해 8월과 10~11월에도 남북은 산발적으로 전투를 벌였다.

당시 황해도 옹진군 옹진읍에 살았던 백령도 주민 박순진(82) 씨는 “북한군이 늦은 밤 38선 이남으로 침입해 경찰이나 민간인을 납치해 가면, 국군이 다시 구출해 오는 등 접경지역 주민들은 늘 긴장 속에 살았다”며 “군복을 입지 않았어도 까까머리면 인민군, 머리가 길면 국군으로 구별했다”고 회상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서쪽 옹진반도부터 개성, 동두천, 춘천, 주문진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지상 공격을 개시하면서 한국전쟁이 시작됐다.

순식간에 옹진반도를 접수한 북한군은 이틀 뒤 백령도에 상륙했다. 북한군 1개 중대가 섬에 들어와 연화리에 진지를 구축했다.

북한군이 철수하기까지 3개월 동안 백령도 주민들은 쥐죽은 듯이 지내야 했고, 반공청년단체 활동을 했던 몇몇 주민은 북한군에게 붙잡혀 심문을 받으며 갖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당시 대한청년단 소속이자 예비역 소위였던 김응석(89) 씨는 “인민군이 나를 당시 파출소에 가둬놓고 욕하고, 때리고, 일주일 동안 밥을 굶겼다”며 “그해 9월 전황이 불리해진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주민 80여 명을 죽이려 했다가, 워낙 급하게 철수하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북한군이 섬을 휩쓸고 간 뒤, 전쟁이 낳은 비극은 피할 수 없었다. 주민 가운데 소위 ‘부역자’로 낙인 찍힌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주민 17명이 진촌리 인근 북한군이 방공호를 만들던 ‘당개’라는 장소에서 처형됐다고 전해지나, 처형한 주체는 알려지지 않았다.

백령도 주민들은 3개월간 북한군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던 수많은 사람을 모두 부역자라고 몰아세울 순 없었다. 그들은 이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역자라고 불린 사람을 북한군과 관계의 정도에 따라 ‘갑·을·병’으로 분류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갑으로 분류된 주민은 희생됐고, 을·병으로 분류된 주민은 살렸다.

연중기획 사진 6.
①8240부대원들이 모여 인원 및 복장 점검을 하고 있는 모습. 1952년 서해안의 한 섬으로 추정. ②1953년 서해안의 한 섬에서 미군의 지도 하에 사격훈련을 하고 있는 8240부대원. ③백령도 진촌리에 남아있는 8240부대 막사. ④미군 복장을 입고 있는 8240부대원 모습, 1952년 겨울. ⑤한국전쟁 당시 천연비행장으로 쓰인 백령도 사곶해변. ⑥북한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일부 백령도 주민이 처형당한 진촌리 인근 당개. /임순석·박경호기자 sseok@kyeongin.com /군사편찬연구소 남보람 연구원 제공

#서해도서 특수전 펼친 동키부대

1951년 1·4후퇴 이후 황해도에서 수많은 피란민이 백령도, 연평도 등 지금의 서해5도로 몰렸다. 피란민들은 주로 지주나 엘리트 출신이었고, 대부분 기독교 신자였다.

당시 미군을 비롯한 유엔연합군은 한반도 전문가나 첩보요원 등이 없어 정보 싸움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미군이 내세운 대책은 지역을 잘 알면서도 반공의식이 투철한 피란민을 작전에 투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51년 4월 탄생한 부대가 유엔유격군으로 불린 8240부대이다. 주민들에게는 ‘동키(당나귀)부대’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데, 무전기에 필요한 발전기 모양이 당나귀와 닮았다고 해서 붙였다고 한다. 동키부대의 주 임무는 옹진반도나 북한군이 점령한 서해도서에 침투해 첩보를 수집하거나 적의 주요 시설을 타격하는 것이다.

부대규모는 가장 컸을 때가 20개 예하 부대에 병력 3만2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는 특수작전을 위한 비정규군이었다. 각종 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동키부대원들은 미군으로부터 고강도 훈련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키부대 출신인 백령도 주민 이형걸(82) 씨는 “평안북도 연안의 신미도에 침투하기 위해 낙하산 훈련을 받았다”고 했다. 백령도 진촌리 공공하수처리시설 옆에는 동키부대 막사와 부대원들이 사용했던 우물이 아직 남아있다.

동키부대는 백령도에 기지를 구축한 미8군 소속 레오파드(Leopard)부대의 지휘를 받아 작전을 펼쳤다. 1953년 휴전 직전까지도 옹진반도와 서해도서를 대상으로 기습·교란작전을 감행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북한군은 동키부대의 기습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옹진반도 일대에 2개 사단을 배치하기도 했다. 동키부대의 활약은 휴전 이후 서해5도를 차지하는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형걸 씨는 “옹진반도는 물론 지금은 이북인 황해도 초도 등 서해도서까지 점령하는 데 동키부대가 앞장섰다”며 “고향을 되찾고자 하는 의지가 전투의 원동력이 됐다”고 했다.

남보람(육군 소령)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은 “8240부대의 작전 성과가 매우 우수했기 때문에 미 육군군사연구소가 관련 보고서를 내고, 미군 특수전 관련 교범의 참고교재가 되기도 했다”며 “이들의 활약상에 대한 국내에서의 재조명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전 세계에 두 곳밖에 없는 천연비행장 중 하나인 백령도 사곶해변도 한국전쟁에서 유용하게 쓰였다. 이형걸 씨는 동키부대원이던 당시 사곶해변으로 전투기가 비상착륙하거나 해상으로 추락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고 한다.

사곶해변이 한국전쟁 때 유사시 전투기 비상착륙장소였던 것이다. 사곶해변에는 한 주에 2~3차례씩 군용물자를 실어나르는 운송기가 이·착륙했다.

/글 =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