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대청·소청 제외 나머지 도서들 북한 편입
NLL로 같은 지명 인천·황해도 행정구역 달라
인구 2400명 연평도 피란민 1만2800여명 몰려
상당수 섬 떴지만 지척에 고향 못잊어 남기도
40년 넘게 덕적도 혼혈아 등 1600명 해외 입양
섬에는 고향을 바로 눈앞에 두고 평생 가보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실향민이 생겼고, 인천 섬은 그렇게 전쟁의 아픔을 품었다. 인천 섬이 품은 전쟁의 아픔은 실향민만은 아니었다. 덕적도에는 전쟁고아와 혼혈아를 키우며 입양을 보냈던 보육원이 있었다.
#남과 북, 두 개의 옹진군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총사령관, 북한군 최고사령관과 중공군 사령관은 전문 5조 63항으로 된 정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3년에 걸친 한국전쟁이 막을 내렸다. 한 달여 뒤인 8월 30일 마크 클라크(Mark Wayne Clark) 유엔군 총사령관은 동해안과 서해안에 설정된 군사분계선인 북방한계선(NLL)을 발표했다.
NLL은 연평도 북쪽 약 1.4㎞ 해상에 그어지면서 같은 해주 생활권이던 대수압도, 소수압도, 용매도 등은 모두 북한으로 편입됐다.
백령도와 대청도·소청도를 제외한 옹진반도 연근해 섬들도 모두 북한지역이 됐다. 정전협정이 체결될 당시 한국군과 유엔군이 장악하고 있던 어화도·창린도·월래도·기린도·초도·난도·소수압도·대수압도·용매도·납섬·덕도 등은 우리 영토가 되는 게 당연한 듯했으나, 서해의 섬들에는 예외조항이 적용됐다.
정전협정문에는 ‘서해의 경계는 1950년 6월 24일의 전선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하면서도 황해도·경기도의 경계선 북쪽과 서쪽에 있는 모든 섬 중에서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 등 5개 섬은 유엔군 사령관 통제하에 남겨두고, 나머지 모든 섬은 북한군 사령관과 중공군 사령관 통제 아래 두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한반도에는 남한의 인천 옹진군과 북한의 황해도 옹진군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개의 행정구역이 생겨났다. 한국전쟁 이후로도 ‘두 개의 옹진군’ 사이 접경해역은 ‘한반도의 화약고’로 남아 세 차례의 교전이 벌어졌고, 2010년 우리 해군 초계함인 천안함이 백령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같은 해 11월 23일에는 북한군이 한국전쟁 이후 60년 만에 남한 영토를 향해 직접 포격을 가한 ‘연평도 포격’이 발생하면서 서해5도는 오늘까지도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애끓는 피란민의 삶
1950년 10월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두 달 뒤인 12월 20일 북한군은 해주를 점령하고 옹진반도로 진출했다. 1951년 1·4후퇴 때에는 수많은 주민이 남쪽으로 내려가기 위해 해안가로 몰렸고, 해군 함정·어선·목선 등을 타고 백령도와 연평도 등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연평도를 비롯한 인근 21개 섬에 약 10만 명이 피란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인구가 2천400여 명에 불과했던 연평도에도 1만2천800여 명의 피란민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연평초등학교에 피란민 약 450명이 수용될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토굴이나 움막에서 생활해야 했다.
일부 피란민은 인천이나 서울 등지로 흩어졌지만, 대부분은 전쟁이 끝나서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라며 고된 피란생활을 감내했다. 피란민 가운데 젊은 남성들은 유엔군에 편입돼 서해도서와 옹진반도 등을 중심으로 전투나 첩보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소연평도에서 피란생활을 했던 김처녀(97) 씨는 “지금 섬에 지어진 집들이 전쟁 때는 거의 다 움막이나 토굴이었다”며 “감자나 고구마라도 있으면 다행이었고, 마실 물도 부족했다. 땅바닥에선 습기가 올라와 많은 사람이 병에 걸렸다”고 회상했다.
전쟁이 끝나자 상당수 피란민이 생계를 찾아 섬을 떠나 육지로 향했지만, 고향을 그리며 남은 사람도 꽤 많았다.
황해도 연백군 출신 연평도 주민인 이은하(85) 씨는 “언젠가는 가볼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생각하면서, 날씨 좋은 날에는 멀리서 고향 땅이 보이는 걸 위안 삼아 부지런히 살았다”며 “세상을 뜨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이북에 좀 가보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고향을 잃은 피란민 1세대들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이 기억하는 고향과 피란 당시 이야기 등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그들의 기억, 증언 등을 기록하는 것은 통일이 가까워지는 시기 남북 간 격차를 줄일 수 있는 핵심 방안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남긴 아픔을 품은 덕적도
덕적도에는 40년 넘게 혼혈아 등 고아의 해외입양사업에 헌신한 서재송(86) 씨가 살고 있다. 그는 1966년부터 ‘서해 낙도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최분도(Benedict Zweber·1932~2001) 신부와 함께 고아들을 보살폈다. 서재송 씨가 돌본 고아 가운데는 기지촌에서 미군을 상대하던 여성과 미군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가 많았다.
서 씨는 1994년까지 1천600여 명의 고아를 미국, 캐나다, 호주 등지로 입양을 보냈다. 아이들은 입양 전까지 덕적도, 인천 송현동, 부평동 등에서 지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혼혈아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매우 심했고, 정부조차 사회적 문제로 치부했다. 해외입양은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서재송 씨는 “혼혈아인인 데다가 이중장애까지 안고 있는 아이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이중장애가 있으면 비자 발급이 안 됐다”며 “아이 엄마가 도와달라며 간곡히 부탁해 미국 여성 영사를 통해서 해외입양을 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서 씨는 최분도 신부와 함께 1982년 미국에 처음으로 간 이후 2년에 한 번꼴로 입양을 보낸 아이들을 만나왔다. 서 씨는 2001년 미국을 방문한 이후 14년 만인 올 9월 고령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찾았다. 기지촌 출신 혼혈인 관련 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서재송 씨는 콘퍼런스에서 그가 걸어온 길에 대해 발표했고, 참석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 자리에는 서 씨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입양인들도 함께 있었다. 그가 입양을 보냈던 혼혈인 수십 명은 숙소로 직접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지난 13일 덕적도 자택에서 만난 서재송 씨는 미국 방문 때 만난 입양인들에게 보낼 편지를 한창 쓰고 있었다. 서 씨는 “공항에서 중년의 흑인과 백인 수십 명이 백발의 동양 노인을 따라다니니까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봤다”며 “피는 달라도 모두 한 식구였던 것이고, 내가 이들을 돌봤던 이유”라고 했다.
/글 =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