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 처리 민심을 따라 행하라”
여러 신하들에 전한 ‘애민사상’
1960년 겨울, 수원 남창초등학교 6학년이던 우리들은 6·25동란으로 성곽이 부서지고 먼지가 뽀얗게 쌓인 팔달문을 청소했다. 뚜렷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팔달문 돌계단에 앉아 동급생들과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그 때 청소 후 손가락에 초겨울 햇살을 가득 담아보려 했던 기억이 새롭다.
1975년부터 당국은 팔달문 보수를 거듭, 옹성을 비롯해 여러 문루를 복원했는데 돌계단이 필자의 기억 속에는 역사의 잔해처럼 남아 있다. 삼도 제일의 명승지에 팔달문을 세우고 팔도 각지의 인재들을 불러 모아 새 세상을 펼치는 것이 정조의 꿈이었다.
수원은 삼도 제일의 명승지로 꼽히고 / 三都推第一
팔달문으로 애써 만방을 불러 모으네 / 八達務懷來
잠시 경륜의 솜씨를 시험해 보다가 / 試經綸手
이내 변방의 장재를 널리 구하노라 / 旋求鎖 才
누각은 하늘에 의지하여 높이 빛나고 / 樓依天宇
성벽은 들의 문을 돌아 안고 있으며 / 城抱野門廻
일 처리는 민심 따라 그대로 행하고 / 料理自深淺
관청의 동이에서 술 익는 소리가 크다 / 官樽聽醱
채제공의 ‘팔달문루(八達門樓)’의 시운을 사용한 이 시의 핵심은 마지막 두 구절이다.
행정 처리가 민심을 그대로 행하는 것은 우선 백성과 하나 되려는 정조의 마음의 표현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일을 직접 다루는 채제공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말이다. 결구의 ‘관청엔 술동이 익는 소리가 크다’가 바로 그러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1794년 8월 25일, 이명식(李命植)이 쓴 상량문에서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한 뒤에 / 땅의 신령이 몰래 붙들어 주고 / 하늘의 아름다움 많이 이르게 하소서 / 산과 시내의 안과 밖은 / 큰 나라 당겨서 빛이 있게 하고 / 기둥과 서까래는 둥그렇게 높이 솟아 / 오래오래 내려가서 견고하게 되소서’ (수정 국역 화성성역의궤 권3, 경기문화재단, 2001년, 참조)라고 기원한 것도 동일한 소망이다.
오늘날에도 그 화려하고 장중한 위용을 자랑하는 팔달문을 바라보며 오늘의 시정 당국자들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정조의 애민사상을 제대로 실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 시인 최동호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