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에 가까운 중국식 건물' 양국 양식 공존
평소 개방않고 협회임원 신년인사회 장소로
제사용품 등 수십년 된 물건 많은 '보물창고'
화교 출신 '미스차이나' 이수영씨 방문 흔적도
인천의 오래된 이웃 "문화와 전통 기록 필요"
선린동 8가는 주말마다 방문객들로 발 디딜 틈없는, 흔히 짜장면 거리로 알려진 북성동 일대 '지금의 인천차이나타운'에서 약간 비켜있는 곳이다. 중국 음식점들이 길게 늘어선 짜장면 거리로 향하다가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은 4~5대를 이어 이 땅에 사는 인천 화교 사회의 중심지이자 인천차이나타운의 본래 모습을 간직한 공간이다. 선린동 8가 인천화교협회 건물 뒤편에는 청국영사관 부속 건물이던 회의청(會議廳)이 있다.
초대 청나라 영사로 부임한 가문연(賈文燕)이 1910년 지은 것으로 알려진 일종의 회의실인데, 정말 회의를 했던 공간인지를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아 건물 이름으로 용도를 추측할 뿐이다.
회의청은 현재 평소에는 개방하지 않은 채 비어있고, 새해 첫날 인천화교협회 임원들이 모여 신년인사회를 하고 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리훙장(李鴻章)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가 인천에 주둔할 때 함께 들어온 군역상인 40여 명이 한국 화교의 시발점이다. 이후 조선이 개항한 이듬해인 1884년 4월 청나라가 관리하는 치외법권 지역인 청국조계가 인천 개항장에 설정되면서 청국영사관도 세워졌다.
청국영사관에는 본청, 순포청(경찰서), 전보국 등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현존하는 건물은 회의청이 유일하다. 청국영사관 본청은 현재의 인천화교학교 유치원 자리 인근으로 추정된다.
지난 6일 오후 30년간 인천화교학교 교사를 지낸 화교 왕청덕(74) 씨와 함께 회의청을 찾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인천 화교들과 교분을 쌓으며 인천화교학교 아카이빙(기록보존) 작업 등을 해온 사진작가 서은미 씨도 동행했다.
회의청의 생김새는 한국과 중국이 교차하는 화교의 삶과 닮았다. 한국과 중국의 건축양식이 섞여 있는 것이다. 회의청은 기단 위에 건물을 세우고, 맞배지붕을 올린 벽돌건물이다. 기와는 건축 당시의 것이 아니라 개보수 과정에서 교체한 것이다.
중국 건축을 연구하는 홍기택 건축가는 "중국 특유의 붉은색 창살 무늬 등 외양 때문에 언뜻 중국풍 건물로 보일 수 있다"며 "하지만 처마 끝이 날아가는 듯한 한옥의 특징 등이 있어 한옥에 가까운 중국식 건물이라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회의청 안으로 들어가면 화교들이 재물신으로 모시는 관공(관우)의 초상화와 신주가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해상무역상들의 수호신인 마조상도 눈에 띈다. 과거 파라다이스인천 호텔 자리에 마조를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상업 중심의 인천 화교 사회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회의청은 인천 화교들의 보물창고이기도 하다. 각종 제사 용품이나 중국 전통 악기 등 내부에 있는 어느 것 하나 50년 이상 나이를 먹지 않은 게 없을 정도다.
이날 동행한 왕청덕 씨는 거실에 있는 원형 탁자를 건드리며 "이것은 100년도 넘었다"고 했다. 이어 왕 씨는 관우 초상화를 가리키며 "저 그림을 훔쳐가면 3대가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장난스레 말했다.
회의청 거실에 전시된 인천 화교의 옛 사진 가운데 흥미로운 사진을 발견했다. 1961년 대만에서 '미스 차이나'로 선발돼 같은 해 영국 런던에서 열린 미스 월드에서 2위를 차지한 이수영(당시 18세) 씨가 인천화교학교를 방문한 장면이다.
이수영 씨는 1944년 인천에서 태어나 1950년대 중반 인천화교학교를 졸업한 뒤 대만의 대학교에 진학했다. 1962년 미스 차이나로 금의환향한 이수영 씨는 17일 동안 전국을 순회했고, 당시 대통령이 되기 전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부인인 육영수 여사까지 만났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수영 씨의 일정을 연일 보도할 정도로 화제였다.
회의청 내부는 거실을 중심으로 양쪽 끝에 방이 하나씩 있는 구조다. 왼쪽 방은 화교들의 국적인 대만(중화민국)을 건국한 쑨원(孫文)을 기념하는 전시실이다. 오른쪽 방은 1960~70년대 인천 화교 청년회 사무실로 쓰던 공간이다. 당시 사용했던 물품이나 문서 등이 그대로 남아있어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벽 한편에는 1978년 제59회 전국체육대회를 인천에서 개최한 것에 대해 인천 화교 청년회가 물심양면으로 애써 줘서 감사하다며 원병의 인천시장이 수여한 감사장이 걸려 있다. 회색 철제 책상에는 청년회의 옛 이름인 '한국인천화교청년반공구국회'가 새겨져 있다.
당시 '반공'은 한국사회는 물론 화교학교를 통해 대만식 반공교육을 받아온 한국 화교사회를 관통하는 이데올로기였다.
회의청 옆에는 언덕 위에 세워진 인천화교학교가 있다. 회의청과 화교학교를 구분 짓는 높은 돌담에 시멘트를 바른 흔적 세 군데가 있는데, 다름 아닌 방공호 입구다.
방공호는 화교학교 운동장 안쪽까지 파여있을 정도로 넓다고 전해지는데,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화교학교 학생들이 자꾸 들어가 위험하다는 이유로 1980년대 입구를 막았다고 한다.
인천 화교들은 음력설인 춘절에 인천차이나타운의 유일한 중국절 겸 사당인 의선당(義善堂)에서 축제를 벌인다. 이에 앞서 인천화교협회 임원들은 매년 양력 1월 1일 회의청에서 제사를 지내며 신년하례회를 갖고 있다.
인천 화교의 관청이던 청국 영사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회의청은 인천 화교 사회를 대표하는 건축물로서 100여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인천화교협회 사무실에는 '本固枝榮'(본고지영)이라고 쓴 글씨가 걸려있다. 1992년 봄 중국 산둥성 룽청시의 한 단체에서 선물 받은 서예작품인데, '뿌리가 굳으면 가지가 번성한다'는 뜻으로 진흙 속에서 꽃을 피운다는 연꽃을 나타내는 말이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화교들의 신념으로도 읽힌다.
인천화교협회 직원 왕윤령(55·여) 씨는 "다른 국적(대만)을 갖고 있지만, 고향의 마음은 항상 내가 사는 이곳(인천차이나타운)"이라며 "회의청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오랜 세월을 견뎌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화교는 지난 130여 년 동안 인천의 오랜 이웃이었지만, 그들에 대한 조명은 아직 부족하다.
최근 인천화교학교 아카이빙 작업을 마치고 책으로 엮은 서은미 씨는 "화교는 항구도시·공업도시로서 외부에서 여러 사람이 유입돼온 인천의 다양성을 잘 보여주는 사람들"이라며 "인천 화교가 계승하고 있는 문화와 전통 등 사라질 수 있는 것에 대한 기록이 앞으로도 필요하다"고 했다.
/글 =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