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유물 다량 출토 국가귀속
현지에 보관·전시 해야 '이상적'
발굴 결과, '元香寺'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기와가 다량 출토돼 원부리사지가 '원향사'라는 사실이 밝혀질 수 있었다.
아울러 강원도 영월군에 소재한 '징효대사보인탑비(澄曉大師寶印塔碑)'의 기록에 의해 원향사가 흥녕사(興寧寺)의 '선나별관(禪那別觀)', 즉 흥녕사에 속한 선종사찰이라는 사실도 드러났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선종 9산문 중에서 '사자산문(獅子山門)' 소속이었던 것도 알게 됐다.
원향사지 발굴 현장에서는 목탑지를 비롯해 21여 개소의 건물지가 확인됐다.
유물로는 경주에서 제작된 최상품의 기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귀면와 등 특수기와, 12세기 고려불교의 기복적 성향을 시사하는 '앙천기복(仰天祈福)'명(銘)의 평기와, 당시 활발한 국제 교류를 증명하는 다양한 형식의 중국자기, 고려초기 나한상으로는 처음으로 발굴된 소조나한상 등이 발굴됐다.
이 외에도 발굴 지역 밖에서 청동소종(靑銅小鐘)과 금동탄생불을 우연히 발견, 국가귀속 처리돼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원향사지 출토 문화재 중에서 가장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은 청동소종이다. 높이가 27cm에 불과한 소형임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시기의 전형적인 동종에서 확인되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과 비천상(飛天像)이 정교하게 조각돼 있다.
그런 반면 종의 다른 부위의 조각기법은 사실감이 떨어지고, 위·아래 띠장식의 문양이 섬세하지 못해 간략화의 경향을 보인다.
또 유곽(乳廓)이나 유두(乳頭)의 표현 수법 또한 정교하지 않은, 다시 말해 예술작품으로서 최성기를 지나 대중화 단계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적 속성을 통해 이 청동소종의 제작시기는 대략 9세기 말에서 10세기 전반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까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범종은 완형과 파종(破鐘)을 합해 9점에 불과하고, 그중 5점만 국내에 남아있을 뿐 나머지 4점은 일본으로 유출됐다. 국내 5점 중에서도 양양 선림원지 범종은 화재로, 남원 실상사 범종은 반파된 상태로 출토된 탓에 완형은 상원사 범종, 성덕대왕 신종, 청주 운천동 출토 범종 등 3점에 불과하다.
이 중에서도 청주 운천동 출토 범종은 어떤 사찰에서 사용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이런 실정에서 출토지가 분명한 통일신라시대 양식의 원향사지 청동소종은 불교미술사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청동소종은 금동탄생불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을 뿐,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다. 이런 까닭에 여주박물관에는 복제품이 전시 중이고, 금동탄생불은 복제품마저 볼 수 없는 실정이다. 원향사지는 일부 발굴 조사된 중부내륙고속도로 구간을 제외하고는 현재 미발굴 상태다.
문화유산은 현지에서 보관·전시되는 것이 이상적이며, 유적은 전모가 밝혀져야 그 역사적 가치가 배가된다. 이런 의미에서 원향사지 자체를 비롯해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에 대한 보존·활용 방안이 적극적으로 마련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