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효자·열부·의인에 문려"
태조 이성계 즉위교서에 천명
아버지 구하려다 전사한 김함
적병피해 투신한 손자 며느리
정면4칸·측면1칸 '정려' 세워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에 즉위하고, 채 12일도 지나지 않은 7월 28일 즉위교서를 내린다. 이 즉위교서는 국정운영의 기본방침을 담은 강령이라 할 수 있는데, 모두 17개 조목으로 돼 있다. 그 중 여섯번째 조목에 '충신(忠臣)·효자(孝子)·의부(義夫)·절부(節婦)는 풍속에 관계되니 권장(勸奬)해야 될 것이다.
소재 관사(所在官司)로 하여금 순방(詢訪)하여 위에 아뢰게 하여 우대해서 발탁 등용하고, 문려(門閭)를 세워 정표(旌表)하게 할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즉 충신·효자·열부·의인 등을 국가적으로 찾아내 벼슬도 주고 요역도 면해주며 표창도 하겠다는 것이다.
이렇듯 조선의 개국세력은 삼강(三綱)을 사회의 도덕 규범으로 삼아서 유교사회를 권장하겠다는 의지를 즉위와 함께 천명했고, 이는 조선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이념으로 조선후기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충효열(忠孝烈)에 대한 국가적 권장으로 정표(旌表) 수여는 시대가 흐를수록 증가했고,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그 숫자가 몇 배로 늘어나 정려와 정문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문화재가 됐다.
경기도에 산재하는 수많은 정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서흥김씨삼강정문(瑞興金氏三綱旌門, 경기도 기념물 제77호)'을 들 수 있다. 이 정려는 서흥 김씨 가문에서 배출된 충신 김충수와 아들 김함의 효행과 효성이 지극했던 며느리 2인의 행적을 기리고자 나라에서 세운 정려다.
김충수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왜병과 접전하다 수적인 열세로 적에게 잡혔는데, 이 때 아들 김함은 아버지를 구하고자 홀로 적진에 쳐들어가 함께 전사했다. 김함의 손자며느리인 온양 정씨는 병자호란 때 적병에게 쫓기게 되자 두 딸과 함께 연못에 투신자살해 정절을 지켰다.
일반적으로 정려 건물은 정면 1칸·측면 1칸의 단칸 건물이 일반적이나, 이 삼강정려에는 여러분의 정판(旌板)을 모셨기에 정면 4칸·측면 1칸으로 돼 있다.
지금 정려는 박제품이 돼 있다. 경기도를 대표하는 서흥김씨삼강정문마저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으며, 다른 정려들도 '전근대적 잔재'라는 이유로 무시되고 있다. 심지어 강요된 행위라며 폄하되기도 하고, 엉터리 정표도 적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삼강의 윤리는 조선사회를 이해하는 바로미터(barometer)이자 숱한 국난에도 조선을 지켜낸 이념적 버팀목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명예'와 '의리'를 헌신짝처럼 생각하고 영리와 사욕만을 챙기는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한 덕목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정려가 지닌 역사·문화·이념적 가치가 재인식되고 새롭게 부각돼, 건강한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활용됐으면 한다.
어쨌든 조선시대 일부 위정자들이 정치적 목적하에서 충효열을 부정적으로 이용한 부분도 있고 진정성이 빠진 껍데기만 강요된 측면도 있지만, 그 알맹이만은 모든 시대가 요구하는 소중한 가치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