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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남구 학익동 580의 1 일대에 조성된 극동방송의 옛 사옥과 사택 전경. 미국 복음주의동맹선교회(TEAM) 소속의 선교사들은 사옥 한 채와 사택 일곱 채 등을 짓고, 극동방송의 전신인 한국복음주의방송국을 설립해 대한민국의 첫 해외송출 방송을 했다. 극동방송 옛 사옥과 사택은 바닷가를 면하고 있는 인천 학익동에 위치해 있었다.(작은 사진/극동방송 제공)

미국식 빨간벽돌 외벽·초록색 기와지붕·미닫이 붙박이 가구 특징
서울 이전 1967년까지 행사 중계도… 현재 사옥 OCI 노조가 사용
전문가 "근대화가 남긴 산업유산… 공공 문화시설로 재활용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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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남구 학익동 580의 1. OCI 인천공장의 본관 뒤, 하얀 수증기를 내뿜는 공장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곳에 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봤음직한 '작은 마을'이 있다.

빨간 벽돌과 초록 기와, 지붕 위로 솟아오른 굴뚝 그리고 봉긋하게 올라선 언덕으로 이어진 작은 길과 정원을 갖춘 이곳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해외 방송을 송출했던 극동방송(옛 한국복음주의방송국)의 사옥 한 채와 선교사들이 거주했던 사택 일곱 채가 있다.

지난 4일 오후 극동방송의 옛 사옥과 사택을 인천 지역 사회에 알렸던 (사)인천사연구소의 김상태 소장, 허은심 전임연구원 등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OCI 인천공장의 본관 뒤, 회색 벽돌의 담 안쪽에 조성된 이 '마을'의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왼편에 사택 세 채와 오른편에 사택 네 채가 보인다. 이어 작은 정원을 끼고 형성된 원형 교차로 형태의 길을 따라 왼쪽으로 향하면 국내 첫 해외 송출 방송국인 극동방송 옛 사옥이 있다.

김 소장은 "2010년께 인천역에서 시작하는 철길을 따라 걷던 중 OCI의 전신인 동양화학공업까지 이어진 철길 끝에서 이 건물들을 발견했다"며 "'극동방송 50주년 화보사(史)' 등을 통해 이곳이 극동방송의 전신인 한국복음주의방송국 사옥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극동방송의 옛 사옥과 사택들은 극동방송의 전신인 한국복음주의방송국이 첫 방송을 송출한 1956년보다 1~2년 앞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에서 방송국 개소 준비를 하던 선교사 일행은 직접 벽돌과 시멘트 등을 이용해 사옥과 사택을 지었다. 미국의 벽돌 건물 양식을 적용해 빨간 벽돌로 외벽을 세웠으며, 초록색 기와를 이용해 지붕도 올렸다.

현재 건물은 1959년 동양화학공업이 인천 남구 학익동 일대를 매입하면서 임원진 숙소, 노동조합 사무실 등으로 활용하기 위해 일부 개·보수를 했지만, 외부는 건축 당시의 형태를 대부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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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방송 옛 사옥의 현재 모습. 지금은 OCI의 노동조합사무실로 활용되고 있다.

극동방송 옛 사옥은 OCI 노동조합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바다 쪽으로 창을 낸 큰 방에 스튜디오가 설치돼 방송을 녹음했다고 한다. 사옥의 실내엔 맞닿아 있는 방의 벽을 뚫어 하나로 합친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도 보였다.

건물 입구 뒤쪽으로 돌아가니 실내와 건물의 다른 외벽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나무 재질로 만들어진 출입문과 유리 창틀이 있었다.

함운식 OCI 노조위원장은 "노조사무실로 사용하면서 방을 일부 개조하고, 일부 벽은 벽지 등으로 막으면서 처음 형태의 모습과는 좀 달라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선교사들이 주거한 사택은 2층에 세모난 다락방을 갖춘 여섯 채와 지하 1개 층을 포함한 건물 한 채 등 모두 일곱 채다.

허은심 연구원은 "인천 동구 여선교사합숙소가 기숙사 형태의 건물이었다면, 이곳은 가족단위로 건물을 지었다는 점이 다르다"고 말했다.

건물 내부는 미닫이 형태의 붙박이 가구들이 배치돼 있고, 다락방과 2층 등으로 올라갈 수 있는 좁은 계단이 있다.

김정하 OCI 인천사업부 관리팀장은 "(극동방송이 서울로 사옥 이전 후) 사택 일곱 채에 공장장을 비롯 임원 8명의 가족이 각각 보증금 500여만 원과 관리비 일부를 내고 살았었다"면서 "임원들의 부인들이 대문을 열면 마주쳐야 하는 공장 근로자들 때문에 도통 밖으로 나오기 힘들었다고 전해 들었다"고 설명했다.

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생활했던 선교사와 그들의 가족이 이곳을 찾아왔으나 지금은 찾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조수진 씨의 논문 '극동방송의 대북방송 연사연구 - 1956년 개국부터 90년대 말까지'를 비롯한 관련 논문에는 극동방송의 옛 사옥과 사택들의 건립 과정, 초창기 극동방송의 방송 환경 등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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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왓슨 등 선교사 일행이 극동방송 옛 사옥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극동방송 제공

극동방송의 옛 사옥과 사택들은 미국 복음주의동맹선교회(TEAM·The Evangelical Alliance Mission) 소속의 선교사들이 지었다.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상업방송을 하던 톰 왓슨(Tom Watson) 선교사는 1950년 밥 존스 대학(Bob Jones University)에 설교하러 왔다가 한인 유학생 강태국(한국성서대학교 설립자) 씨를 만난다.

왓슨은 강 씨로부터 "한국에 와서 직업방송 대신 복음방송을 시작해 줄 것"을 부탁받고, 한국복음주의방송국의 개국 준비를 한다.

그는 1954년 7월 27일 당시 체신부로부터 무선국 설치 허가를 받아 김포공항과 부천 사이의 여월리에서 전파 송신 설비를 설치하고 시험방송을 하지만, 김포공항으로 이·착륙하는 항공기에 전파장애를 일으킨다는 문제점이 지적돼 지금의 위치로 이전한다.

극동방송 창사 30주년을 기념해 지난 1986년 한국을 찾은 톰 왓슨은 극동방송의 한 방송프로그램 인터뷰에서 "방송사 위치는 내가 플로리다에 있을 때 엔지니어에게 배운 것인데, 염분이 있는 바다에 안테나가 있으면 강력한 전파를 송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천 학익동은 당시 바다에 면해 있었다. 인천 지역 사회는 이들이 갯벌에 안테나를 세울 수 있도록 학익동 간석지 일부를 무료로 제공했다. 갯벌에는 133m 높이의 안테나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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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방송 옛 사택의 실내 모습.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이곳은 OCI 전신인 동양화학공업의 인천공장장을 비롯 임원진 가족들이 거주했다. 미닫이 형태의 붙박이 가구들이 배치돼 있는 모습.

1956년 12월 23일 오후 5시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손수 세운 한국복음주의방송국 사옥에서 호출부호 HLKX, 주파수 1천230㎑의 첫 방송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 송출 방송이 인천에서 시작된 것이다.

미국의 선교단체가 주도한 방송인 만큼 북한·중국·러시아 등 한반도 인근의 공산권 국가들에 선교와 자유주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등으로 방송을 송출했다.

1962년 7월에는 인천 북성동 3-8에 연주소(演奏所·방송 등을 제작하는 곳)를 신설했다. 학익동 사옥은 송신소(送信所·방송 등을 내보내는 곳)로 활용했다.

극동방송은 1964년 9월 인천에서 개최된 제45회 전국체육대회의 생중계, 1966년 6월 제2회 인천시민의 날 특집방송, 인천항 제2선거 기공식 준공 방송 등을 중계했다.

그러나 1967년 12월 23일 극동방송은 인천을 떠나 서울 마포구에 새로운 터를 잡게 된다. 1980년대 말 인천 학익동 바닷가에 서 있던 안테나도 사라졌다.

인천에서 활동 중인 김정숙 건축사는 "OCI 인천공장 내에 있는 극동방송의 옛 사옥과 사택 등은 인천이 근대화를 거치면서 남겨진 산업유산이자 근대 건축물"이라며 "지역의 역사성 등을 반영한 산업유산으로 활용해 공공 문화시설로 재활용하는 방안을 시와 업체 등이 찾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글 = 신상윤기자 ssy@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