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경애묘지명
최루백효자비(사진 왼쪽), 염경애묘지명. /경기문화재단 제공

고려사 열전에 실린 '간판 효자'
15세 때 父 해친 범 죽여서 복수
처 묘지명에 존중·애틋함 담겨
'효동이…' 공연등 재평가 활발


조선시대 세종이 친히 글을 내려 효행을 칭송한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효자인 최루백(崔婁伯, ?~1205)이다. 그의 효행은 '고려사(高麗史)' 열전은 물론 조선시대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에도 실려 있다. '고려사' 열전에 실린 그의 효행록은 다음과 같다.

최루백(崔婁伯)의 아버지가 사냥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해를 당했는데, 최루백은 당시 15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바로 도끼를 메고 호랑이를 잡으려 나섰다. 그가 호랑이를 발견했을 때, 호랑이는 이미 배불리 먹고 누워 있었기에, 도끼로 내려쳐 죽인 다음 배를 갈라 항아리에 범의 고기를 채워 개울가에 묻었다.

또 부친의 뼈와 살을 골라내어 그릇에 담아 홍법산(弘法山) 서쪽에 장사지낸 후 여막을 짓고 무덤을 지켰다.

한편, 그는 자신의 아내 염경애(廉瓊愛, 1100~1146)가 죽자 묘지명을 직접 짓기도 했는데, 그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아내는 사람됨이 아름답고 조심스럽고 정숙하였다. 자못 문자(文字)를 알아 대의(大義)에 밝았고 말씨와 용모, 일솜씨와 행동이 남보다 뛰어났다. 출가하기 전에는 부모를 잘 섬겼고, 시집온 뒤에는 아내의 도리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어른의 뜻을 먼저 알아 하고자 하는 그 뜻을 받들었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님을 효성으로 봉양하였고, 안팎 친척의 좋은 일과 언짢은 일, 경사스러운 일과 불행한 일에는 다 그 마음을 함께 하였으니, 이로써 훌륭하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묘지명에는 가난한 생활을 말없이 견디며 자신을 성심으로 내조한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존중의 뜻이 담겨져 있는데, 글쓰기의 수법이며 기풍에 있어 놀랍게도 후세 박지원(朴趾源)의 산문을 연상케 할 만큼 개성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참고로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http://gsm.nricp.go.kr)에 접속하여 '최루백처염경애묘지명(崔婁伯妻廉瓊愛墓誌銘)'을 검색하면, 묘지명의 사진, 원문, 해석문을 만날 수 있다.

효는 백행의 근본이고 선행의 시초이며 인륜의 으뜸이다. 그리고 부부지도(夫婦之道)는 만복의 근원이며 가정을 지키는 버팀목이다. 우리 사회는 이들 가치를 무시하고 등한시해 왔다. 그런 까닭에 노후는 불안하고 황혼이혼(黃昏離婚)이 늘고 있다. 인간관계의 근간이 흔들리니, 나이가 들수록 마음은 위태롭고 혼자만 세상에 남겨진 듯 외롭다.

이런 세태에서 최루백의 효행과 부인의 내조, 그에 대한 남편의 감사하는 마음은,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덕목이 아니겠는가.

현재 최루백효자비(화성시 향토유적 제2호)는 화성시 봉담면 분천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가 지은 아내 염경애의 묘지명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문화재적 가치는 상대적으로 낮지만, 그것이 지닌 문화콘텐츠는 풍부하며 교훈이고 새로운 느낌을 준다.

따라서 우리에게 무의미한 문화재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거리'를 제공하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최루백효자비는 도지정문화재로 승격해도 손색이 없다.

지난 2015년 10월 '효동이와 최루백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최루백의 효행담이 동탄복합문화센터 반석아트홀에서 공연되었다.

이처럼 문화콘텐츠로 활용될 수 있는 문화유산이, 앞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체계적으로 보호·관리·활용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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