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양공주' 성매매 묵인·외화벌이 수단 활용
1950년대 클럽거리 형성 1970년대 중반까지 호황
백인전용 술집 '1층 무대·테이블-2·3층 룸' 형태
1983년 대폭 리모델링… 바닥재·계단 등은 그대로
"현대사에서 잊혀진 역사… '시대상징' 복원해야"

인천 부평구 부평3동에 있는 부일식당은 1950~70년대 이 일대에 번성했던 기지촌과 미군클럽거리를 기억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1980년대까지 드림보트(Dreamboat)클럽이 자리했던 부일식당에서는 미군클럽과 '양공주' 또는 '양색시' 등으로 불린, 미군을 상대한 한국 여성으로 상징되는 기지촌의 상흔을 찾을 수 있다.
인천 부평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미군기지가 들어선 지역이다. 일본이 1939년 부평 한가운데에 조성한 육군 조병창(군수공장)을 해방 직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미군이 그대로 접수했고, 애스컴(ASCOM·미 제24군수지원단)이 주둔해 기지화했다.

1949년 6월부터 미군이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철수했던 1950년 9월까지 고작 1년 3개월을 제외하고, 비록 그 규모가 축소되긴 했으나, 2016년 2월 현재까지 부평 일부는 다른 나라의 땅으로 남아있다.
'신촌'이라 불린 부평 미군기지 맞은 편에는 기지촌이 생겨났다. 기지촌 문화의 중심인 클럽은 음악을 틀고 춤을 추거나 술을 마시는 미군의 유흥공간이면서 양공주를 만나는 장소였다. 외국인만 상대할 수 있는 '특수관광업' 허가를 받아 영업을 하면서 면세주를 팔았다.
부평역사박물관이 지난해 한 학술조사에 따르면, 한때 신촌 일대에는 20여 곳의 미군 클럽이 성업했다. 미군 주둔 이후 생기기 시작한 클럽은 애스컴이 현재의 캠프마켓(Camp Market)으로 축소되는 197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이뤘다.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미군기지 땅이던 '2001아울렛 부평점' 건너편부터 경원대로를 따라 부평공원 쪽으로 드림보트클럽, 홍콩홀, 그린도어클럽, 아리랑클럽, 신일홀, 신장홀, 세븐클럽, 서브달러클럽, 맘보홀, 신세계클럽 등이 줄지어 영업하며 클럽거리를 형성했다.
부평미군기지가 축소되자 미군클럽이 하나둘씩 문을 닫았고, 1990년대 중반에 완전히 사라졌다. 미군이 떠난 땅에 아파트단지 등이 조성되면서 신촌 클럽거리에 있던 건물은 대부분 철거되고 상가건물이 들어섰다. 드림보트클럽이 있던 부일식당 건물이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일식당은 약 190㎡ 면적의 1층 공간과 43㎡의 2·3층 공간을 가진 3층짜리 건물이다. 드림보트클럽이 영업할 당시 1층은 춤을 추는 무대와 10여 개의 테이블로 구성돼 있었고, 2·3층은 방으로 된 술집이었다. 이 일대 옛 건물 대부분이 불법 건축물이었다가 나중에 등록돼 언제 지은 건물인지는 알 수 없다.
부일식당 사장 한정철(77) 씨는 1983년 이곳에 식당을 차리면서 건물 내부를 대폭 리모델링했는데, 클럽 바닥재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등은 그대로 남겼다.

한정철 씨는 이 지역 출신은 아니지만 1960년대 초 애스컴 55보급창에서 카투사로 군 복무를 했다. 그는 "군 생활을 할 때에도 신촌 일대는 미군들이 가는 클럽, 바버샵(이발소), 테일러샵(양복점), 미용실 등이 가득했다"며 "상가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양색시들이 열댓 명씩 세 들어 사는 주택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드림보트클럽은 백인들만 출입하는 곳이었다. 드림보트클럽 바로 옆에는 흑인 전용 클럽인 송도홀이 있었다. 백인 전용 클럽에는 재즈와 로큰롤 음악을, 흑인 전용 클럽에는 소울 음악을 즐겨 틀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컸던 드림보트클럽은 밴드가 라이브 연주도 했다.
양공주들은 클럽에 가서 미군을 만났다. 이들은 인근 포주의 집에 세 들어 살면서 미군을 데려와 성매매했다. 가구가 귀한 시절이었지만, 양공주의 방에는 꼭 침대가 있었다고 한다. 1969년 4월 한 신문 보도에 따르면 양공주가 미군과 하룻밤을 치르는 대가로 받는 돈은 시간에 따라 3~15달러 정도였다.
또는 매달 일정하게 생활비를 지급하는 계약 동거 형태로도 미군과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옛 드림보트클럽 화장실 문에는 'USE RUBBERS ALWAYS ITS THE BEST WAY TO KEEP FROM GETTING V.D. ASK THE MANAGEMENT BEFORE YOU GO OUT WITH A GIRL(성병을 예방하는 최선은 콘돔을 사용하는 것. 여성과 나가기 전 매니저에게 문의하시오)'이라고 적혀 있기도 했다.

또 양공주들은 미군 내 매점(PX)에서 '양키시장'이라 불린 부대 밖 암시장으로 물건을 공급하는 통로 역할도 했다.
1950년대 말 경기도 내 기지촌에는 양공주 5천 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는데 이 가운데 부평이 1천500명으로 가장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성매매는 엄연한 불법이지만, 양공주에 대해선 묵인하고 '관리'를 했다. 이들이 외화벌이 수단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정부는 1961년 '유엔군 상대 위안부 성병 관리 사업계획'을 시행하고, 양공주가 경찰서 여경반에 등록해 매주 2회씩 성병 검진을 받도록 했다.
양공주가 미군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다치는 사건도 많았다. 1969년 5월 부평 기지촌 셋방에 살던 25세 여성이 목에는 전깃줄이 감기고, 온몸이 칼로 난자돼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20세의 미군 병사가 이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됐다. 화대를 요구하며 동침을 거절했다는 게 여성을 살해한 이유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양공주들이 자치회를 조직해 미군기지에서 시위하는 등 집단행동에 나서는 일도 있었다. 1969년 9월 드림보트클럽에서는 미군과 양공주 간 몸싸움이 벌어졌는데, 싸움을 중재하려던 자치회장이 미군에게 머리채를 잡혀 미군부대 안으로 끌려 들어가려고 하자 양공주 100여 명이 부대 정문으로 몰려가 '투석전'을 벌이기도 했다.
부평미군기지 땅이 80여 년 만에 반환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부평 기지촌 역사의 중심에 있던 미군은 대부분 떠났고, 클럽 주인이나 양공주 출신들이 공개적으로 당시를 회고하는 일은 거의 없다. 관련 연구자들은 "기지촌이 부끄럽고 더럽다는 이유로 현대사에서 잊혔다"고 표현한다.
부평 신촌지역을 연구한 김현석 (사)시민과대안연구소 연구위원은 "일제강점기 조병창에서부터 미군 주둔까지 시대를 상징하는 기지촌을 역사 속에서 복원해야 한다"며 "기지촌의 흔적으로서 부일식당 건물이 가치를 지니는 이유"라고 말했다.
/글 =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