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2401001537900080371
① 한국전쟁 직후의 제물포구락부 모습(사진 상단). 현재 건물 왼편의 주출입구는 없으며, 건물 전면의 주출입구를 볼 수 있다. ②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사용된 1970년 즈음의 제물포구락부. 건물 앞에 도로가 생기면서 건물 전면의 주출입구가 없어졌다. ③ 일제 강점기 외국인이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 찍은 사진으로, 제물포구락부의 지붕이 잘 드러난다. 지붕 색깔이 다르며, 난로 연통도 보인다. /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장 제공

벽돌조 2층 '일본식 합각·맨사드 지붕' 양철 마감
외국인 문화·경제 거점… 근거없는 내부복원 씁쓸
박물관·문화원 이어 '영상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
매년 페스티벌 열어 국가간 우호증진 제역할 찾아

2016022401001537900080372
1883년 제물포란 이름으로 개항한 국제도시 인천은 전통도시의 쇠락과 정반대로 일본의 배려 아래 잘 나가는 신흥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중략)… 근대적인 시가지와 대형갑문 등의 축항시설, 측후소, 공원 등이 들어선 인천은 20세기 초부터 '근대화의 별천지'로 자리 잡았다. -노형석 저 '모던의 눈물 모던의 유혹' 중에서(생각의나무 刊)

개항 이후 인천은 '양관(洋館)의 도시'였다.

인천 최초의 양관은 자유공원 야생 조류장 터에 자리잡았던 세창양행 숙사(宿舍) 건물로, 1883년 세창양행을 설립하기 위해 독일 함부르크에서 온 세 명의 독일 상사원 숙소로 지어졌다. 이 건물은 1950년 인천상륙작전 당시 포화로 소진됐다.

우리나라 호텔의 효시로, 인천에서 문을 연 대불호텔이 지어진 연대는 확실치 않다. 아펜젤러 목사가 묵은 날짜가 1885년 4월이었음을 볼 때 그 이전으로 추측된다. 대불호텔은 1899년 경인선 개통 이후 불황을 겪으면서 중국인에게 팔렸다. 새 주인은 건물을 개조해 청(淸)요리집 중화루로 용도 변경했다.

이 건물은 1978년 6월 철거됐다. 대불호텔 건너편에서 상점을 하던 중국인 이태(怡泰)라는 사람도 스튜어드호텔을 지어 외국인을 상대로 운영했다. 이 건물도 한국전쟁 때 함포 사격으로 파괴됐다.

이밖에 주한 미국 전권공사였던 호레이스 알렌의 별장, 영국인 제임스 존스톤의 별장, 제물포구락부 등은 당시 인천은 물론 국내 랜드마크로 꼽히던 양관들이었다.

연중기획 고택기행 제물포 구락부8
개항 이후 각국 조계가 설정되고, 그 안에 공원(각국공원·현 자유공원)이 자리 잡은 건 당시 시대적 추세였다고 볼 수 있다. 더해서 조선의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모인 외국인들은 그네들끼리 교류하고 쉬기 위한 공간이 필요했으며, 제물포구락부를 건립했다.

이 중 제물포구락부 만이 현존해 있다. 제물포구락부는 개항기 인천에 거주하던 미국·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 및 기타 외국인과 소수의 중국·일본인들의 친목을 돕는 사교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1901년에 건립됐다.

이바노비치 세레딘 사바틴(Ivanovich Seredin Sabatin·러시아)이 설계한 이 건물은 벽돌조 2층 건물(지상 1층, 반 지하 1층)로 연면적은 386.8㎡이다. 지붕 형태는 일본식 합각(合閣)지붕과 맨사드(Mansard)지붕으로 처리했으며, 마감 재료는 양철을 사용했다.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손장원의 다시 쓰는 인천 근대 건축'에서 제물포구락부의 외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제물포구락부의 정면은 가로와 세로방향으로 3개의 영역으로 분할됐다. 세로방향으로는 가운데 부분을 약간 돌출시키고, 그 위에 맨사드지붕으로 처리해 변화감을 연출했다. 또한 정면의 중앙부와 오른쪽 부분에 설치한 창문 상부는 페디먼트(Pediment) 장식을 두었지만, 좌측 창문 상부는 평아치로 처리했다.

손 교수는 전체적인 대칭성에서 변화를 주기 위해 설계자가 의도했을 것으로 봤다. 이 같은 요소들은 일반 대중에게 여타 건물들과 차별된 느낌을 줬을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사교실·도서실·당구대 등이 마련됐고, 외부에 테니스 코트도 있었다.

연중기획 고택기행 제물포 구락부3
1950년대 촬영된 사진을 보면 주출입구는 건물 정면에, 부출입구는 건물 오른편에 있다. 건물 정면의 주출입구와 계단은 도로가 개설되면서 철거된 것으로 보이며, 자유공원과 연결된 계단이 있는 건물 왼편의 주출입구가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

'근대화의 별천지'인 제물포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외국인 무역상들과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던 정치인들에게도 책을 읽고, 당구·테니스를 치고, 나아가 술과 함께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방한 이유야 어떻든 타향살이에 지친 외국인들에게 제물포구락부는 위로와 함께 웃음을 제공했을 것이다.

1914년 외국인 거주지역인 각국(各國) 조계(租界·외국인이 자유로이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는 구역)가 철폐되자 제물포구락부는 시대 조류에 따라 여러 차례 사용자와 용도가 변경됐다. 외국인들의 사교 공간이었던 제물포구락부는 일본 재향군인회관, 부인회관 등으로 사용됐다.

이 시기에 건물의 명칭이 현재의 것으로 굳어졌다. '제물포클럽'이 본 명칭이었으나, 일본인들이 자국식 가차음인 '구락부'로 칭한 것이 그대로 굳어져 오늘까지 이어진 것이다. 광복 후에는 미군이 사용했다. 1953년부터 1990년까지는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이용됐고, 1990년부터 2006년까지 인천문화원으로, 2007년 제물포구락부로 재탄생했다.

용도가 바뀌면서 내부 시설도 수차례 변경됐다. 내부 형태를 추정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다. 외관은 사진들이 남아 있어서 이를 근거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현재 건물 왼편의 주출입구는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1950년대 촬영된 사진을 보면 주출입구는 건물 정면에, 부출입구는 건물 오른편에 있다. 건물 정면의 주출입구 계단은 도로가 개설되면서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연중기획 고택기행 제물포 구락부13
제물포구락부는 용도가 바뀌면서 내부 시설도 수차례 변경됐다. 내부 형태를 추정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정확한 옛 모습은 알 수 없다. 현재 이 공간에선 역사성을 살려 대한민국 인천과 해외 국가 간의 우호증진, 전통문화와 현대·미래가 조화를 이루는 교류의 장이 수시로 열리고 있다.

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장은 "기록을 통해 밝혀진 건물의 시설과 구조를 봤을 때, 제물포구락부는 외국인들의 문화·경제적 거점이었으며, 서구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며 전진기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평가했다.

이어서 "내부를 모르는 상태에서 복원된 현재의 모습은 아쉽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중국의 상하이구락부를 참조했다고 하는데, 없으면 없는 대로 비워두는 게 문화재 복원의 기본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1993년 7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제물포구락부는 현재 영상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설립 당시 '문화 교류의 장' 역할을 했던 이 건물은 100여 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현재도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인천광역시문화원연합회가 운영하고 있는 제물포구락부에선 인천국제문화교류페스티벌이 2012년부터 해마다 열리고 있다. 지난해 행사의 경우 일본, 터키, 중국, 이란, 인도, 독일, 멕시코 등 7개국이 참여해 각국의 문화를 소개하고 교류했다.

천광식 제물포구락부 관장은 "제물포구락부는 각종 유물을 소장하고 소개하는 유물 전시관이 아닌 100여 년 전 외국인들의 교류장으로써, 일상과 다른 옛 흔적과 느낌을 받아가는 곳"이라며 "이 공간에서의 역사성을 살려 대한민국 인천과 해외 국가 간의 우호증진, 전통문화와 현대·미래가 조화를 이루는 교류의 장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글 =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