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성당 : 1900년 강화읍에 세워져 '성베드로와 바울로성당'으로도 불린다 }
■최초의 '민초 성당' 평신도 힘으로 세운 십자가
{ 온수리성당 : 1906년 온수리에 신축… 2003년 인천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받아 }


전통 한옥기법 외형·서양식 내부 조화이뤄
종·태극·연꽃 문양 등 불교 사찰 닮은 모습
건축재료 백두산 적송·강화산 화강암 사용
#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인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성베드로와 바울로성당'으로도 불린다. 1900년 지어진 국가지정 문화재(사적 242호)인 이 성당은 언뜻 보면 불교 사찰로 착각할 정도로 한국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성당 외부는 한식 기와가 얹혀진 전통 한옥 양식이다.
외관에 비해 성당 내부는 서양의 교회 건축 양식인 '바실리카 양식'에 따라 지어져 서구 기독교가 한국 문화를 거스르지 않고 토착화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영국 성공회는 초기 선교 거점으로 강화를 택했다. 강화도가 영국 성공회의 뿌리가 된 지역인 스코틀랜드 서안의 아이오나(Iona)처럼 한국의 성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성공회는 같은 선교지역에서 다른 교단과 마찰을 일으키며 경쟁적인 선교를 펼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당시 강화도는 여타 종교의 선교가 많이 이뤄지지 않은 지역이기도 했다.
강화성당은 1890년 성공회를 전파한 찰스 존 코프(1843~1921) 주교에 의해 지어졌다. 성공회의 강화도 선교는 1893년 영국인 워너 신부가 갑곶리에서 작은 초가집을 사들이며 시작된다. 후임으로 온 트롤로프 신부가 강화성내로 선교본부를 옮겨 전도활동을 펼치다 교세 확장에 따른 필요로 1900년 11월 15일 지금의 성당이 건축된다.

현재 성당이 자리 잡은 터는 배 모양으로, 성서에 나오는 구원의 방주 역할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250명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는 40간 규모로 지어졌다.
건물 외형은 전통 한옥 고건축 기법을 따랐지만, 내부는 서양식 방식을 택했는데, 성공회 강화성당은 한국 최초로 한옥양식을 도입한 성당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서양종교와 한국문화의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강화성당 곳곳에서 발견된다. 성당의 정문에서도 이 땅과 어울리려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성당 중앙문 정문에는 태극무늬가 발견되고 그 무늬 안에 십자가 모양을 새겨 넣었다. 성당의 종을 보관하는 '종각'의 기능을 하는 내삼문에 있는 종은 사찰의 범종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붕의 서까래에서도 연꽃문양을 볼 수 있다. 강화 성당의 목재는 백두산의 적송을 썼다고 전해진다. 이 백두산의 적송을 뗏목으로 강화까지 옮겼다. 경복궁 재건으로 서울 주변의 목재가 부족하자 멀리 백두산에서 찾았다고 한다. 재단이나 세례대 등에는 강화산 화강암이 사용됐다.
성당의 유리나 벽돌은 일본, 중국 등에서 들여왔고 성당에 있는 4개 출입문은 영국에서 보내왔다.
4대가 넘게 강화에서 살고 있는 강종훈(60) 신도회장은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이라는 점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매년 4만명이 성지순례 차 오고 있다"며 "이러한 성당의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사 로스 헌신적 의료선교 덕에 교세성장
전통문화 존중 자발적인 헌금·참여 이끌어
목구조 형식 한국형 교회건축양식 큰 의미
# 교인들의 힘으로 지은 최초의 성공회 성당 온수리성당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온수리 성당은 인천시 유형문화재 52호로, 1906년 지어졌다. 단아하고 아담한 한옥 양식이 보존된 한국형 교회건축양식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1997년 인천시문화재자료 15호로, 2003년에는 인천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온수리 성당 역시 강화읍 성당과 마찬가지로 기와를 얹은 전통 한옥 양식으로 지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온수리 성당은 오로지 이 지역 평신도들의 힘으로만 지어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성당은 선교단체나 교단의 도움 없이 평신도들의 힘으로 지어진 한국 최초의 성당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성공회가 강화에 선교를 시작한 것은 1893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워너 신부가 먼저 강화읍 갑곶이에서 고아와 거지들을 추스르며 교리와 신앙을 심었다. 1897년 로스가 난저골로 불리던 강화 온수리에 진료소(약국)를 설치하고 진료사업과 함께 선교사업을 전개했다.
1898년 1월부터 9개월간 여러 마을의 242가정을 돌아보면서 3천528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서울로 보냈다고 한다.
난저골은 온수리 장터에서 1㎞정도 떨어진 곳으로 그 이전부터 천주교인이 은거했던 지역으로 전해오는 곳이다. 로스는 초기 이곳과 강화읍을 왕래하면서 진료 사업을 계속하다 1900년에는 이곳으로 완전히 이동해 진료와 전도사업에 전력했다.

의사 로스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명성이 높아지면서 환자들이 먼 거리를 마다치 않고 치료를 받으러 왔고 그를 찾아온 환자는 대체로 신자가 됐다고 한다.
로스의 의료 활동에 힘입어 1906년에는 영세 희망자가 100명이 넘을 정도로 교세가 성장했다.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자 그해 쓰던 성당을 헐고 새로 15간의 성당을 건축하기로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교인들의 열성과 특별헌금으로 원래 교구가 계획한 규모보다 약 배가 늘어난 27간의 전통 한옥으로 성당을 만든다. 로스의 헌신적인 의료선교 활동에 자극받은 평신도들이 땅을 기증하고 특별 헌금을 내어 마련된 건축비로 새 성당을 짓게 된 것이다.
온수리성당의 건축은 강화읍성당이나 다른 지역의 교회와 달리 시작에서 축성까지 평신도들의 힘으로 이뤄낸 대한성공회 최초의 성당이다. 온수리성당은 전통 목구조 형식으로 정면 3칸, 측면 9칸으로 용마루 양끝에는 십자가가 보인다.
건물 정면 처마 밑에는 연꽃문양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진흙 연못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는 것처럼 성서적 의미를 담았다.
온수리성당 김영희 관할사제는 "전통문화를 존중하며 정착하려는 성공회의 노력으로 지역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며 신도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냈다"며 "이러한 노력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글 =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