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고택기행·12] 도원동 부영주택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강점기 병참기지화로 노동자들 살 집 부족하자 주택단지 계획
인천 행정관청 첫 공급 도시계획 상징 한옥 3채·개량 1채 남아
1942~1948년 죽산과 가족 거주… 정치가 길 들어선 중요한 시기
2011년 무죄판결 불구 관심 사그라들어 공공차원 보존 필요성


◈죽산의 맏딸 조호정씨가 부영주택 단지에서 기억하는 아버지
그곳엔 대부분 조선사람이 살았고,
일본사람은 두 집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바빠서 집에 자주 오지 못했고
청년들이 집에 많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유독 로맨틱 영화를 좋아했다
겉으로는 강인한 모습만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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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지방관청인 인천부청(仁川府廳)은 지금의 중구 도원동, 동구 송림동, 남구 용현동과 숭의동 등에 도시계획에 따른 주택단지를 조성했다. 1930년대 후반 인천지역에 각종 공장이 들어서고, 도시가 확장하면서 생긴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당시 인천부가 직접 지어 분양한 집을 '부영(府營)주택'이라 부른다. 지금의 '시영(市營)아파트'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인천 중구 도원동 12 일대에는 산비탈에 2m 남짓 높이의 축대를 쌓아 지은 부영주택 3채가 나란히 있다. 1940년 건립된 도원동 부영주택은 지금이야 낡은 한옥쯤으로 여기기 십상이지만, 인천의 지방행정관청이 처음으로 계획을 세워 공급한 인천 도시계획 역사의 상징이다.

또한 도원동 부영주택은 인천 출신으로 두 차례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거물 정치인이었으나, 간첩으로 몰려 '사법 살인'을 당하고도 50년이 넘어서야 그 누명을 벗게 된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1899~1959) 선생이 1940년대 살았던 집으로써 인천에 남은 죽산의 유일한 흔적이기도 하다.

인천 연중기획 고택 도원동 부영 주택
현재 남아있는 도원동 부영주택(한옥) 3채 중 한 곳은 빈집이다. 전문가들은 이 빈집이 건축 당시 구조와 모습을 상당 부분 간직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 인천 첫 단지 분양주택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조선 식민지 정책을 '병참기지화' 방향으로 바꾼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인천은 군수품 생산과 수송을 위한 군수공업단지로 성장하게 되는데, 각종 공장이 확장·신설되면서 다른 지역에서 인천으로 몰려든 노동자들이 살 집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인천부는 1939년 '소(小)주택'이라는 이름으로 단지 분양주택 건설을 논의, 1940년 '도산(桃山)주택'이라는 이름의 첫 번째 부영주택을 도원동에 지었다. '도산'은 도원동의 옛 지명인 '도산정(桃山町)'에서 가져왔다.

인천시립박물관의 2014년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인천부가 작성한 '인천부영주택조성계획서'에서 부영주택 계획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생산력 확충에 수반되는 각종 공장의 진출이 두드러지며, 이에 필요한 인적자원인 공장노무자는 증가를 보이기 때문에 주택의 품귀를 초래한다. 각종 중요 산업의 원활한 운영을 방해하는 현 상황에 비추어 본 계획을 세워 300호를 건설하고자 하며, 부평을 포함한 병참기지로 장차 산업도시로서 목적달성상 크므로 국책에 부합 기의에 입각한 조치다."

인천 연중기획 고택 도원동 부영 주택 조봉암 선생 거주 주택
죽산 조봉암이 1942년부터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돼 서울로 가기 전까지 가족들과 살았던 도원동 부영주택. 현재 나란히 남아있는 한옥 3채 가운데 중간 집. 집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건축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인천부가 도원동 부영주택을 건설한 것은 조선총독부가 지금의 한국토지주택공사와 비슷한 기관인 '조선주택영단'을 설립해 단지주택 공급계획을 수립한 1941년보다 빠르다.

인천시립박물관은 2014년 조사에서 1940년대 위성사진 등을 분석해 도원동 부영주택은 총 28동이 지어진 것으로 파악했다. 부영주택은 도원동을 시작으로 동구 송림동, 남구 용현동과 숭의동, 부평구 부평동 등에 건설된 것으로 확인됐다.

도원동 부영주택은 대부분 철거됐고, 현재 나란히 남아있는 한옥 3채와 일본식 개량주택 한 채만 남았다. 한옥은 지하 1층, 지상 1층짜리 건물로 158.7㎡ 대지에 건축 면적은 78㎡이다. 마루와 방 2칸, 부엌이 딸린 구조다.

2014년 인천시립박물관 조사에 참여한 홍현도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일제강점기 지방관청이 주도해 지은 한옥은 보기 드물뿐더러 일본이 한옥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의미가 있는 주택"이라며 "역사적 관점에서 보존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고택기행 죽산 조봉암 선생 장녀 조호정 인터뷰9
조호정 씨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죽산의 도원동 시절을 또렷이 기억했다. 자신과 아버지가 살던 부영주택이 보존돼 역사성을 지닌 장소로 활용됐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 부영주택과 죽산 조봉암

죽산 조봉암은 1942년부터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임명돼 서울로 가기 전까지 가족들과 도원동 부영주택에 살았다.

죽산의 맏딸 조호정(88) 씨와 죽산의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현재 나란히 남아있는 한옥 3채 가운데 중간 집이 죽산이 살던 집이다. 20채가 넘는 인근 부영주택이 헐리는 동안 다행히도 죽산이 살던 집은 아직 헐리지 않은 것이다.

죽산이 도원동에 살던 때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그가 해방을 맞고 공산주의에서 전향, 본격적으로 정치가의 길을 걸으면서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된 중요한 시기다.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조호정 씨를 만나 죽산의 도원동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부영주택으로 이사 왔을 당시 조호정 씨는 중구 답동 박문소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죽산은 벼를 찧을 때 나오는 겨를 공급하는 인천비강업조합 조합장을 맡고 있었다.

조 씨는 "(부영주택 단지에) 대부분 조선사람이 살았고, 일본사람은 두 집 정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며 "아버지는 바빠서 집에 자주 들어오지 못했고, 청년들이 집에 많이 찾아왔다"고 회상했다.

조 씨는 해방 전에는 집으로 죽산을 찾아온 경찰의 위협이 무서웠고, 해방 후 격동기 속에서는 공산주의 진영과 갈등을 빚으며 싸우는 게 불안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학생이라 세상 물정도 몰랐지만, 아버지가 갈등도 많고 (정치적인) 싸움도 많이 했다는 건 알았다"고 했다.

조 씨는 죽산이 도원동 집에서 키우던 '샤리'라는 애완견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걸곤 하던 모습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샤리'는 죽산이 좋아하던 할리우드 인기 아역배우 셜리 템플(Shirley Temple)에서 딴 이름이다.

조 씨는 "아버지는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집 근처 애관극장이나 표관극장에서 영화를 봤는데, 유독 로맨틱한 영화를 좋아했다"며 "겉으로는 강인한 모습만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죽산이 살았던 부영주택을 인천시 등이 공공차원에서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꾸준히 나왔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죽산 조봉암에 대한 재심사건(일명 진보당 사건)에서 간첩과 국가보안법 위반 등 주요 공소사실에 대해 재판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죽산 재조명 바람'이 불면서 부영주택도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죽산이 누명을 벗은 지 5년이 지난 현재는 그러한 관심이 적어진 것이 사실이다. 인천시가 '인천 가치 재창조'의 일환으로 '인천 인물 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인천시청 홈페이지에 있는 '인천의 인물' 코너에서는 여전히 죽산 조봉암이 태어난 해를 1898년으로 틀리게 표기했다.

인물 소개도 "19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이 되어 활동하다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처형됐다"에서 끝을 맺으며 그의 무죄 판결에 대한 내용은 빠져 있다.

/글 =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