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의 사당, 정조대왕 영정 모신 화령전

수원 화령전
사적 115호 수원 화령전. /수원시 제공
조선의 임금들은 돌아가신 후 그 신주가 유교사당인 종묘(宗廟)로 모셔진다. 그런데 조선의 임금 중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으로 전주 경기전이 있다. 더불어 수원에도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대왕의 사당이 있다.

화성행궁 옆에 위치한 화령전(華寧殿)이다. 전주의 경기전은 조선을 건국한 큰 업적으로 태조를 모셨고, 화령전은 순조가 1801년 정조대왕의 화성 축성과 노년을 보내고자 했던 뜻을 기려 영전(影殿)을 조성했다. 순조는 현륭원(顯隆園)과 건릉(健陵)을 다녀갈 때마다 화령전에 참배했다.

화령전은 일반 양반 가옥처럼 소박하게 단청을 하지 않고 토담이 둘러져 정조대왕의 초상(肖像)을 모신 사당으로 만들어졌다. 내부에는 정조의 어진(御眞)을 모실 수 있는 시설로 운한각(雲漢閣)이 있다. 운한각은 화령전의 정전(正殿)으로 격식이나 부재의 사용이 궁궐의 전각에 못지 않다.

앞뜰에는 작약(芍藥)을 가득 심어 향기가 전각 전체에 진동하게 했으며 소나무도 심어 운치를 더했다. 정조의 어진을 모셔 숭배했으나 국력이 쇠락해가며 1909년에 일제(日帝)의 강압으로 어진은 서울로 옮겨졌다. 이후 언제인지 모르게 잃어버리고 1992년에 새로운 영정을 만들어 봉안하고 있다.

화령전은 별도의 관리들을 두어 화성유수와 판관이 관리했다. 또한 1814년(순조 14)에는 규장각에서 정조대왕어제 '홍재전서(弘齋全書)' 100책과 '경모궁예제(景慕宮睿製)' 3책을 인쇄해 화령전에 각 1건씩을 봉장(奉藏)하도록 했다.

그리고 정조대왕 탄신(誕辰)일과 납향(臘享)날에는 제사를 지냈는데, 화령전의 재실(齋室)이 풍화당(風化堂)이다. 풍화당은 제사가 있을 때에는 헌관(獻官)이 머무르는 재실이 되지만 평상시에는 시연을 베푸는 장소로 사용됐다. 풍화당이란 주로 노인들의 시회(試會)를 열고 주연(酒宴)을 베풀어 사회의 풍기(風紀)를 교화한다는 의미가 있다.

화령전이 건립 된지 100여년이 흐른 뒤 화령전 옆에 살았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유화가 나혜석은 화령전과 앞뜰의 작약을 그림으로 남겨 기억했다. 화령전을 보면 정조대왕의 위대함과 '효원의 도시 수원'의 정체성이 지금도 새삼 다가오고 있다.

도움말/이동근 수원시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