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개껍데기 활용해 장식·옻칠
10세부터 故 최준식 선생 도제
하루 10시간씩 창작 '장인정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기물이나 용기에 옻칠을 하면 습기와 병충해의 피해를 막아 줄 뿐만 아니라 고온에도 잘 견디게 해 준다. 이런 까닭에 선사시대부터 칠기가 널리 사용되었고, 역사시대로 들어오면서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한 칠기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에는 값비싼 서역의 주옥(珠玉)이나 거북등껍데기 등으로 장식한 칠기가 등장하였고, 급기야 흥덕왕 9년(834년)에 사치금지령이 내려진다. 그 이후로 칠기의 장식에는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조개껍데기가 이용되었다. 즉 나전칠기가 우리나라 유일의 장식칠기가 된 것이고,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런 나전칠기의 전통을 뚝심 하나로 지켜나가는 명장이, 1972년 이후 성남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4호 나전칠기장 배금용이다. 1944년생인 그는 일찍이 아버님을 여의고 고아원에서 지내다가 상경하여 10살 때부터 고 최준식 선생님으로부터 도제식으로 나전칠기를 배운 인물이다.
타고난 장인 정신과 남다른 성실성, 제1인자가 되겠다는 신념이 더해져 그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리고 1987년 마침내 그의 작품 2점이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입선이 되면서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고, 1989년에 2점을 다시 출품하여 입선되면서 명장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는 평생 옻으로 인해 까맣게 착색된 손끝과 손톱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직도 주문제작을 받지 않는다. 기한을 두고 수요자의 요구에 따라 작업을 하면,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아울러 돈을 쫓으면 머리가 나빠진다고 믿고 돈벌이를 위한 상품제작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가난할 수밖에 없었고, 어렵게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일에 미쳐 가난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는 두세 시간 밖에 자지 않고 작업에 전력했다고 하며, 칠순을 넘은 지금에도 10시간 이상 어김없이 작품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자다가도 좋은 구상이 떠오르면 바로 작업장으로 달려가 실험을 해 보았고, 나전칠기의 전 공정을 제대로 터득하기 위하여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런 한편으로 금속선으로 문양을 넣는 자신만의 기법을 창안하여 나전칠기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도 했다.
어쨌든 성남시민속공예전시관에 자리한 그의 공방에는 100㎡ 공간에 그의 작품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그는 그 공간을 '상품' 전시실이 아니라 '작품'전시실로 여기고 있다. 판매를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모진 가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작품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1998년 9월 경기도에서 인간문화재로 지정한 다음부터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발간한 '한 권의 나전칠기'를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런 지원이 지속되고 또 확대되길 바란다.
아울러 인간문화재가 실질적인 문화자산이 될 수 있는 묘안을 짜내는 데에 무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가 문화적 경쟁력을 가질 수 있고, 경기도민의 삶이 풍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