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짓던 30대후반 '늦깎이 입문'
독학으로 유약·그림·성형등 터득
유려한 곡선·단색미·문양 '일품'
전통방식 청화백자 가장 잘 재현
한국의 미를 대표하는 문화재 중 하나로 백자를 꼽을 수 있다. 조형미의 3대 요소인 색(色), 선(線), 형(形)을 두고 볼 때 유려한 곡선, 순백의 단색미, 단아한 자태가 자연을 닮았고, 그러기에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일상용품을 보고 즐기는 완상용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문양과 도상을 넣어 복덕(福德)과 안녕(安寧)을 구하는 한편, 자기수양의 좌표로 삼고자 했다. 즉 박쥐에서 복을, 포도에서 다산(多産)을, 쌍희문(雙喜文)에서 부부의 사랑을 구했고 매난국죽(梅蘭菊竹)을 통하여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선비의 절의를 실천코자 했다.
이런 의미에서 백자에 푸른 안료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靑華白磁)는 그야말로 '한국의 미'를 오롯이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청화백자의 재현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장인이 있으니,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1호 청화백자 분야 사기장(沙器匠) 백웅(白熊) 한상구이다. 조부 한호석, 부친 한용수로 이어지는 도자집안에서 1938년 경기도 여주에서 때어난 그는, 농부로 지내다가 30대 후반에 늦깎이로 도공의 길로 들어섰다.
그런 까닭에 부모님의 지도를 받지 못하고, 거의 독학으로 흙고르기·유약만들기·그림그리기·성형하기 등을 터득했고, 지금도 도자제작의 모든 과정을 혼자서 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일체의 과정을 전통방식에 따라 작업한다.
즉 전통장작가마에서 구워내며 발로 차는 목물레로 성형을 하고, 그림은 밑그림 없이 바로 그린다. 이런 까닭에 그는 '청화백자의 형태와 색감을 가장 잘 재현했다'는 전문가의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성공의 바탕은 그의 신체적 장애에서 우선적으로 찾을 수 있겠다. 지금은 2003년 수술로 시력이 회복되었지만, 그는 7세 때 눈병을 앓아 한쪽 시력을 잃게 되어 거의 한평생을 장애를 안고 살았다. 이런 그의 장애가 세속과는 거리를 두고 백자에 몰입케 하고 그것을 통해 위안을 얻고 자기정체성을 찾게 한 듯하다.
즉 세상의 영리(營利)에 눈감고, 오로지 '백자 바라기'로 그의 삶을 이끈 것 같다. 다음으로 그의 탐구욕과 실험정신이다. 이런 도전정신이 올곧은 장인정신과 연결되어, 독각(獨覺)의 경지에 오를 수 있게 했다.
그는 79세의 나이에도 중국산 차 종기의 하나인 유적천목(油滴天目, 검은 유약 중에 기름방울 같은 작은 반점이 전면에 드러나게 하는 기법)을 재현코자하는 의욕을 보인다.
아울러 사물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도 한 몫을 했다. 재현에 거듭 실패하여 실의에 차 있던 어느 날, 흙을 박차고 올라오는 새싹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연의 이치에 순응할 때 무정물(無情物)인 도자기도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도통(道通)이 도통(陶通)으로 이어진 것이다.
장인의 나이도 이제 79세이다. 물리적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이 어려운 나이이다. 경제관념이 없는 그를 대신하여 '세상 물정에 밝은' 우리가 그의 작품을 아끼고 지키며, 참된 가치를 인정받게 해야 하겠다. 백남준의 작품이 제값을 받지 못한다고 하고, 그 이유는 가격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백웅(白熊)의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고, 그에 걸맞는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더 나아가 경기도의 명장들의 작품에 가치를 더하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경기도 차원에서 고민해 볼 시점이다.
참고로 그의 작품과 인생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연구센터 홈페이지에서 만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짤막한 전기는 '한국의 고집쟁이들'(나무생각, 2008)에 수록된 '애꾸눈 도공 한상구'를 통하여 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