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고택기행·18] 강화도 '용흥궁'

가문이 역모로 몰린 철종, 대표적인 왕족 유배지 강화에 머물던 '잠저'
즉위후 권위 세우려 신축 '宮으로 승격' 가옥기능 없는 일종의 기념관
전형적 조선후기 사대부 살림집… 유교적 격식 잘갖춘 경기지방 한옥
철종 부친의 5대손 이해승 후손 소유 불구 친일 소송중 정부서 가압류


2016050301000165600008573
인천 강화도는 역사 속에서'몽골군의 침략을 피한 39년간 고려의 전시수도','조선 임금의 보장처(保藏處·왕이 피난하는 곳)'로서 왕실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강화도는 '대표적인 왕족의 유배지'이기도 하다.

고려에서 조선시대까지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왕이나 왕족은 30명이 넘는다. 고려의 수도 개성이나 조선의 수도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섬이라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감시와 통제가 상대적으로 쉬웠기 때문이다.

조선 제25대 임금 철종(哲宗·재위 1849~1863)은 14세부터 왕위에 오르게 되는 19세까지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집안이 역모에 몰렸기 때문인데, 죄인이 왕에 등극한 것은 고려와 조선역사를 통틀어 유일하다.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는 철종이 머물렀던 '잠저(潛邸)' 용흥궁(龍興宮·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0호)이 남아있다. 잠저는 새로 나라를 세우거나 반정으로 임금에 추대된 왕족, 임금이 아들을 두지 못해 종실에서 왕위를 잇도록 추대한 왕족 등이 임금이 되기 전 궁궐 바깥에 살던 민가를 일컫는다.

보통 임금이 된 후 권위를 세우기 위해 잠저를 다시 지어 용흥궁처럼 '궁(宮)'으로 승격시켰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재위 1392∼1398)의 함흥 본궁(本宮)과 개성 경덕궁(敬德宮)을 제외하면 조선시대 잠저는 대부분 서울에 있었으나, 제26대 고종(高宗·재위 1863~1907)과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이 살던 운현궁(雲峴宮) 정도만 현재까지 서울에 남아있다. 용흥궁이 잠저로서 희소성을 지니는 이유다.

철종은 기와집인 지금의 용흥궁이 아닌 초가집에서 형제·친척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현재의 용흥궁은 철종이 즉위하고 4년이 지난 1853년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기존 초가집을 헐고 새로 지은 것이다.

철종이 임금으로 지목되자 서울로 모시기 위해 강화도로 온 봉영(奉迎·왕을 모시는 것) 책임자인 판중추부사 정원용(鄭元容)은 강화유수 정기세의 아버지로, 부자의 공을 기리는 비석이 용흥궁 대문 앞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연중기획/철종 어진
철종어진 원본은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인해 3분의1 가량이 불에 타 소실돼 1987년 당시 한국전통미술인회 회장 최광수 박사에 의해 복원됐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고려궁지로 올라가는 비탈길 동쪽 골목 안에 위치한 용흥궁은 전형적인 조선 후기 사대부 살림집 유형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이 있다. 궁이기 때문에 여성의 공간인 안채는 내전, 남성의 공간인 사랑채는 외전이라고도 부른다.

안채와 사랑채는 경기지방 한옥에서 볼 수 있는 'ㄱ자형'으로 집의 거의 모든 부분이 유교(주리론)적 법규를 모범적으로 따랐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기와지붕 구성물 중 하나인 처마도리는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따라 사랑채는 하늘을 상징해 둥글게, 안채는 땅을 상징해 네모나게 처리한 것도 눈길을 끈다.

용흥궁 보수를 맡았던 문화재 보수 전문가 태인석(飛건설 대표) 씨는 "서울 운현궁처럼 화려하고 규모가 큰 잠저는 아니지만, 유교적 격식을 아주 잘 갖추고 당시 가장 좋은 목재를 써서 만든 집"이라며 "상량문(上樑文·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 등을 적어둔 글)을 보면 30~35년 주기로 보수를 했으나, 실제 사람이 살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용흥궁은 임금의 집인 까닭에 건축한 이후 다른 사람이 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다. 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만든 일종의 기념관인 셈이다.

일반적인 조선 사대부 살림집은 대문을 들어서면 '바깥양반'이 머무는 사랑채가 나오고 '안주인'이 있는 안채를 사랑채 뒤편에 배치한다. 사랑채가 외부인으로부터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를 보호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용흥궁은 사랑채를 안채 뒤편 구릉 위에 지은 특이한 구조다.

왕이 머무는 사랑채의 권위와 전망을 고려해 언덕 위에 배치한 것이다. 각 방에 딸린 툇마루가 적다는 점에서도 용흥궁이 사람이 살 목적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용흥궁은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1785~1841)의 5대손인 이해승(李海昇·1890~?)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이해승은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된 대표적인 친일인사다. 용흥궁은 정부가 제기한 친일재산 환수 관련 소송이 진행되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가압류한 상황이다.

철종은 강화도에서 평민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철종실록'에 실린 철종이 승하한 뒤 명순왕후가 쓴 행록(行錄)을 보면, 철종이 강화도에 살 때 동네에 행실이 못되고 사나운 사람이 있어 술에 취해 문밖에서 소란을 부리며 언사가 오만하기 그지없었는데 보위에 오른 뒤 굳이 문제 삼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당시 강화유수가 철종을 감시하는 것이 매우 가혹해 집안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생각했는데, 임금이 되고 나서 그가 승지 후보에 오르자 낙점했다는 얘기도 실려있다. 철종의 너그러운 성품을 알리고자 하는 의도지만, 강화도 시절 철종의 처지가 그만큼 딱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몰락한 왕족이 하루아침에 왕이 된 것은 당시 실세인 외척 세도가문이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허수아비 왕'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다. 1849년 헌종이 자식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뜨자 순원왕후는 강화도에서 유배 중인 왕족 이원범(철종)을 다음 임금으로 지목했고, 불과 4일 만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권력의 실세인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는 철종이 즉위하고 3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철종은 수렴청정이 끝난 후 왕권 확보 노력도 했으나, 끝내 세도정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재위 후반기를 넘기며 국정에서 관심이 멀어졌다. 그는 결국 강화도를 떠나 왕위에 오른 지 14년 만인 1863년 33살의 나이에 이질을 앓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세도정치에 억눌려 임금으로서 권위만 있지 그 역할은 제대로 하지 못했던 철종의 생애. 겉으로는 번듯하지만 집으로서 기능하지 못한 용흥궁과 무척이나 닮았다.

/글 =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