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각형 돔 형태 종탑… 첨탑 뾰족한 고딕 양식 아닌 보기드문 '로마네스크'
마리아와 예수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와 십자가의 길 14처 부조 벽면 장식
좁은 주차장 등 주변 정리안돼 고풍스러운 분위기 망쳐 "문화가치 살려야"
인천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였을 언덕에 지어진 답동성당은 개항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 등 격동의 역사와 인천의 변화를 지켜보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답동성당에 가면 언제나 역사 공부를 하기 위해 답사온 일행을 쉽게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이 성당은 인천을 대표하는 근대 건축물로 꼽힌다.
지난 13일 성당을 찾아가 1992년부터 성당에 출석하고 있다는 홍순영(59) 평신도 자문위원의 안내를 받아 성당을 둘러봤다. 이날도 역시 여주에서 왔다는 답사 일행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성당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처음 성당을 만나면 고풍스럽고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자태와 아름다움에 누구나 압도된다.
홍 위원은 "역사적 가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성당 건축물이 주는 아름다운 매력에 많은 사람들이 매료된다"며 "때문에 지역의 관광명소로, 신자들의 결혼식 장소로도 인기가 높은 곳"이라고 했다.
성당은 1897년 지어진 초기 성당에 외곽을 벽돌로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개축해 1937년 준공됐다. 1981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
천주교 답동교회가 발행한 '답동대성당 100년사'에 따르면, 제물포로 불리던 인천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홍 요셉(Joseph Wihelem) 신부가 파견돼 1889년 7월 1일 제물포교회를 창설하고 포교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홍 신부는 병인박해를 피해 고잔지역에 정착한 민종황(요한) 일가한테 지금의 땅을 싼값에 기증받아 부지를 마련해 성당건축을 계획했다. 그러나 홍 신부는 곧 신학교로 전임해 완성된 성당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초대 홍 요셉 신부에 이어 두 번째 본당 신부로 부임한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 바오로(Emille LeViel)였다. 그는 자선행위를 통해 교세를 확장했다. 조선 관리에게 병원에서 환자를 간호할 허가를 받아 병들고 부상당한 공장 노동자와 짐꾼들을 돌보는 등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애를 썼다.
답동성당이 세워진 것은 제3대 서 요셉(Joseph Maraval)신부 시절인 1897년 7월. 이때 비로소 지금의 성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1937년 완공된 지금의 성당은 서울 혜화동 성당의 초대 신부였던 시잘레 신부가 설계했다.
성당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가운데 큰 종탑이 있고, 좌우로 작은 종탑이 하나씩 있다. 팔각형의 받침돌 위에 원형 기둥 8개가 서 있고 그 위에 8각형의 돔을 얹은 모습이다.
이는 우리나라에 지어진 성당 가운데 보기 드문 로마네스크 양식의 형태다. 답동성당과 전북 전주에 있는 전동성당을 제외하면 천주교 전교 초기 지어진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당은 첨탑이 뾰족한 고딕양식이다.
고딕 양식은 중세 서유럽에서 유행한 양식으로 대표적인 특징은 바로 높은 건물과 뾰족한 첨탑이 수직적이고 직선적인 느낌을 준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이 고딕 양식이다.
홍 위원과 함께 종탑 안으로 들어가니 3개의 종이 보였다. 홍 위원은 "종탑에 균열이 생겨서 종이 울리지 않고 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하루 3차례, 오전 6시와 정오, 오후 6시에 종지기가 치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며 "성당 주변 사람들에게 시계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그에게서 종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일제는 광복 직전 이 성당 3개의 종을 무기로 만들어야 한다며 가져가려 했다. 성당은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다른 지역 성당에서 종을 헌납하자 버티기 힘들어졌다. 당시 성당의 신부는 기발한 제안을 해 위기를 모면한다.
종을 무기로 만들기보다 마을에 설치해 주민들이 경계태세를 갖추는 용도로 쓰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종은 해방과 더불어 무사히 성당에 되돌아왔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화려한 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무척 아름답다. 스테인드글라스를 자세히 보면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성경 속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 '피에타'처럼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슬픔에 잠겨 있는 그림과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모습 등을 찾아볼 수 있다.
홍 위원은 "이 그림이 추상적인 모양 때문에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재미를 주기도 한다"며 "성당의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는 신자들이 가장 큰 매력으로 꼽는다"고 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 옆에는 십자가의 길 14처 부조가 있다. 입체감이 느껴지도록 세밀하게 묘사된 조각은 성당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더한다.
1937년 6월 30일 축성식이 열렸지만, 당시 성당에는 성당에 꼭 있어야 하는 14처 조각이 없었다. 당시 인천부 협의원인 장광순(프란치스코)씨는 이를 유감으로 생각하고 일금 1천여원의 경비를 들여 서양에 14처 조각을 주문했다. 1937년 11월 1일 이를 성당에 부착하고 신자들이 모여 축하했다.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답동성당은 건축 당시 한동안 인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랜드마크'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지금은 상가건물 속에 묻혀 성당 구역을 조금만 벗어나면 잘 보이지 않게 됐다. 또 주차장이 협소한 탓에 고풍스런 성당이 주차된 차량으로 둘러싸여 성당의 분위기를 망치고 있다.
현재 답동성당 주변을 관광 자원화 하는 사업이 지자체에 의해 추진 중인데 이 기회에 이러한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근대건축전문가인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다른 지자체가 성당의 건축·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잘 가꾸어가고 있는 데 반해 답동성당은 그렇지 않아 늘 아쉬움이 많다"며 "성당 주변이 옛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신중하게 주변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글 =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