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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연 영화평론가
겹겹이 산봉우리다. 중턱마다 길이 있다. 잘 포장된 도로가 산을 휘감으며 이어진다. 유장한 것은 산줄기가 아니라 매끈한 도로라는 듯이. 하늘에 오르지 못한 이무기가 산자락에 드러누운 듯하다. 이무기의 등줄기를 타고 가면 곡성이 나온다. 그러나 길은 이무기가 아니다. 낚싯바늘에 꿴 지렁이다.

곡성으로 가기 위해 길에 오르는 순간 날카로운 바늘이 입천장을 찢는다. 한 번 삼킨 미끼를 뱉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리가 없다. 끌려 다니는 수밖에.

나홍진 감독의 '곡성'이 수상하다. 평론가들의 극찬이 가득하고 열광한 관객들은 헐거운 이야기의 빈 구멍들을 스스로 메우기 위한 해석놀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폭발적인 반응이 어쩐지 개운치 않다. 강력한 몰입도와 참신한 스타일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전반부의 코믹하면서도 불온한 분위기와 중반의 대결구도는 압권이다. 앞의 장면이 다음 장면을 끌어당기고 뒤의 장면이 이전 장면을 끌어안는다.

그러나 결말부를 다 보고 났을 때 남는 것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불공정한 게임을 치른 후의 불편한 피로감이다. 예를 들어 살을 날리는 굿판의 교차편집은 정보의 적절한 제공과 은폐를 통해 논리의 허점을 찌른다기보다는 신적 위치를 점유한 연출의 반칙, 혹은 기만에 가깝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곡성'은 기본적으로 미끼로 상징되는 현혹됨에 대한 이야기이다. 합리적 수사를 해야 하는 경찰은 소문에 현혹되고, 믿음을 지켜야 할 사제는 감정과 자기확신에 현혹된다. 그리고 관객은 강렬한 이미지의 충격과 맥거핀에 현혹되어 휘둘린다. 감각은 이미지의 미끼에 낚이고 이성은 맥거핀에 낚인다.

미끼의 연쇄체다. 정보는 축적되지 않는다. 논리는 비틀리고 의미는 미끌어진다. 물고 물리는 미끼들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곡성'은 하나의 거대한 미끼다. 이 순간 영화는 지워지고 영화가 놓인 자리만 남는다. 그리고 '도둑맞은 편지'처럼 감독과 관객과 평론가라는 기표가 미끼를 둘러싼다.

'곡성'에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곡성으로 가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길에는 갈림길이 없다. 이면도로도 없다. 카메라가 하늘에서 길을 내려다본다. 시선이 셔터를 누른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