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항맞물려 수송등에 날씨정보 중요해져
1883년 인천해관에 관측기구 설치가 시초
日·中 기상실황 통신청취 수기기록 예보
일기도 보관 기상대 옛 창고 '역사관' 활용
원호형으로 된 결원아치 네덜란드식 축조
동시대 건축물보다 '독특·정교' 가치높아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측우기가 발명되고, 하천의 수위를 재는 수표(水標)가 개발되는 등 기상학이 발달한 나라였다. 인천은 독일인 묄렌도르프(Mollendorff, Paul Georg von)가 1883년 9월 1일 인천해관에 기상관측기구를 설치하고, 하루 5번씩 기상을 관측할 것을 지시하면서 국내에서 최초로 기상 관측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천에서 최초로 기상 관측을 하게 된 배경은 개항과 맞물려 있다. 개항과 함께 인천항으로 화물이나 사람을 수송하기 위해선 기상 예측이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는 것이 인천 향토사학자들의 중론이다.

국내의 기상학 역사와 궤를 같이 한 인천기상대는 지난 2013년 10월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정상인 인천시 중구 자유공원서로 61(인천 중구 전동 25의 59)에 신축됐다. 인천기상대 신청사는 7천840㎡ 부지에 지상 2층(979㎡) 건물과 관측장소(490㎡) 등을 갖추고 있다.
인천기상대의 옛 건물은 사라졌지만 1923년 4월 준공된 인천기상대 창고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 23일 오후 찾은 인천기상대 창고는 빨간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들어진 건물로, 건물 정면에 아치형 흰색 출입구 2개와 측면 양쪽에 직사각형 창문 2개 등이 있었다. 지붕은 초록 기와를 얹은 맞배지붕 형태다. 현재 실내는 날씨체험관·기상대역사 등으로 구성돼 '인천기상대 역사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창고 앞에는 "이 건물은 반원보다 작은 원호형으로 된 결원아치가 있는 네덜란드식(혹은 영국식)으로 축조되었고, 또한 출입구 위의 눈썹지붕을 지지하는 까치발은 동시대 건축물과 비교해도 독특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져 역사·문화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이 창고와 인천기상대에 대해서는 1957년 당시 인천측후소(현 인천기상대)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방순태(86)씨에게 들을 수 있었다.
방씨는 "인천측후소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제대로 된 통신시설이나 기상관측장비가 없어서 일본이나 중국 등에서 보내주는 기상실황을 통신장비로 듣고 일일이 수기로 기록했다"며 "이렇게 기록된 인천의 기상정보를 서울기상대로 보내면 서울에서 인천지역을 포함해 기상예보 방송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이어 "수기로 기록한 일기도(날씨 등을 기록한 기록물)는 빨간 벽돌 창고에 보관했었다"고 했다.
방씨는 1949년 해군 부사관으로 입대해 통신 특기를 받아 6·25전쟁 등에 참전한 뒤 1957년 1월 제대했다. 제대 직후 인천기상대에서 통신기술을 갖춘 사람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사했다고 한다.
그는 "관측 장비가 충분하지 않아 기상정보를 일본 등으로부터 통신장비를 이용해 받아야 했는데 통신장비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직원이 거의 없었다"며 "군대에서 익힌 통신기술을 바탕으로 기상관측을 공부하면서 일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인천측후소에 당시 소장을 비롯해 10명이 근무했는데 2인 1조로 나눠 오전 3시와 9시, 오후 3시와 9시 등 4번에 걸쳐 기상정보를 통신장비로 듣고 일기도에 작성했다"고 했다.
그는 인천측후소에서 근무하면서 있었던 일 중에,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일기예보가 틀리면 여지없이 사무실로 걸려오는 전화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방 씨는 "지금처럼 팩스나 인터넷을 이용해 일기 예보를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기상대 건물 앞에 세워진 철탑 안테나 2개에 헝겊을 매달아 예보를 했다"며 "날씨가 맑으면 사각형의 흰색 천을 걸고, 구름이 끼는 날이면 사각형의 녹색 천을 걸었다. 풍향은 삼각형 천에 색깔을 넣는 방식으로 시민들에게 날씨를 알렸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러던 어느날 맑은 날이 예상돼 흰색 천을 걸었는데 오후부터 비가 쏟아졌고, 시민들이 기상대로 찾아와 온갖 항의를 했었다"고 회고했다.
방씨는 인천측후소가 있던 자리에 대한 변천사를 말해주며 "1947년 친구가 일했던 인천측후소를 찾았을 땐 관측소, 창고, 목조건물 등을 비롯해 천체를 관측했던 천문관측 망원경도 있었다"며 "전쟁이 끝나고 입사했을 땐 폭격 때문인지 망원경은 흔적도 없었고, 건물들도 많이 훼손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기상관측을 위해 주변에 건물을 설치할 수 없어 산 정상에 있는 관측소 건물을 제외하면 주변에는 전부 임야였다"며 "측후소를 담당하는 정부의 부처가 바뀔 때마다 학교, 기관 등에 땅을 전부 내줘 인천측후소가 지금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해관에서 하던 기상관측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 기상 관측을 했던 인천은 1905년 1월 현 인천기상대 자리에 임시관측소 건물을 신축하면서 본격적으로 국내 기상업무를 시작한다.
이어 해방 직후까지 인천은 중앙기상대의 역할을 수행한 도시였다. 그러나 1953년 중앙기상대가 서울에 신설되면서 인천에 있던 중앙기상대는 측후소로 기능이 축소됐다가 1992년 인천기상대로 명칭을 바꾼다.
인천기상대 건물은 1984년 12월 원통형으로 지어져 수십 년 간 인천시민들의 랜드마크 역할을 했지만, 이 건물은 지난 2013년 지금의 형태로 신축됐다.
/글 = 신상윤기자 ssy@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