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 여성 선교 맡은 선교사 '벵겔' 주도
십시일반 건축 우리나라 최초 서구식 초교
백두산 소나무 사용 2층 나무바닥 원형보존
교회 건축물풍 4개의 다락·외곽 지붕 특징
一자 대신 'ㅁ' 평면 증축 획기적 교육시설
日강점기 서울 명문사학 진학 유일한 통로
김활란·서은숙 등 수많은 교육선구자 배출
1892년 당시 서울 이화학당에서 성악을 가르쳤던 미북감리교회 여선교사 마가렛 벵겔(Magaret J. Bengel)은 제물포 여성 선교에 중점을 두기 위해 담당 선교사로 파견됐다. 이와 함께 황해도 곡산 출신 미망인 백헬렌이 내려와 본격적인 여성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두 차례 서양의 침략을 겪었던 인천인들은 미국에서 찾아온 전도사들이 전파하는 종교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이에 백헬렌은 가정에서 필요한 물건을 아주 싸게 팔면서 여인들의 인심을 얻는 방식으로 전도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당시 여성들은 글자를 모르는 까막눈이었고, 당시 벵겔은 전도부인인 강세실리아에게 한글과 찬미가를 가르치도록 했다. 그런데 벵겔의 눈에 전도된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온 아이들이 보였다. 이 아이들은 어깨너머로 배운 한글을 엄마보다 더 빨리 익혔고, 찬미가도 더 잘 불렀다.
벵겔은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고 아이들만을 위한 교육 선교를 구상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학교인 인천 영화초등학교의 시작이다.
13일 인천 동구 창영동에 있는 영화초등학교 본관을 찾았다. 1911년 세워진 이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3층 669㎡ 규모의 벽돌 건물로 만들어졌다. 학교 건립비용은 싸리재에 있던 교사의 매각대금과 미국 네브라스카에서 목재 사업을 하던 콜린스의 기부금 1천 달러, 그리고 인천지역 여성신도들이 삯 바느질과 빨래 등으로 모은 헌금으로 충당됐다.
무더운 날씨였지만 학교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시원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초등학교와 한 울타리 안에 있는 인천영화관광경영고등학교의 이성진 교사는 "벽돌로 지어진 외벽과 내벽에 세 뼘 정도의 공간을 둬 내부에 진흙과 석회를 발라 습기를 빨아들이고, 외부 온도를 차단해주는 역할을 하게 설계됐다"며 "이 때문에 여름에는 바깥 온도보다 4~5℃ 정도 낮은 기온을 유지한다"고 말했다.
건물 내부는 성서연구와 기독교 교육을 목적으로 교회 내에 설치하는 전형적인 주일학교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1층 바닥은 콘크리트로 돼 있고, 2층은 목재 마루로 만들어졌다. 2층 나무 바닥은 1911년 건립 당시 그대로 보존돼 있다.
당시 백두산에서 공수해온 적송을 사용했는데 추운 북쪽 지방의 나무들이 워낙 단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직도 바닥 곳곳에는 옹이를 잘라낸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학교가 백두산 소나무를 쓴 이유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역사의 슬픈 단면이 엿보인다.
이성진 교사는 "조선 말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두 차례에 걸친 경복궁 증축 사업을 벌이면서 서울과 인천, 경기도 지역의 소나무들을 모조리 자재로 사용했다"며 "할 수 없이 영화학교는 당시 목재 수송이 용이했던 백두산의 나무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2층의 나무 마루는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있게 됐다.
건물 3층은 다락방으로 'ㅅ'자 형태의 내부에 서까래를 노출 시켰다. 특히, 학생들의 예배와 체육 활동을 위한 강당으로 사용됐던 이곳은 십자형 평면으로 설계돼 종교적 의미를 가미했다고 한다. 건물 지하에는 당시 인천 지역 학교로는 최초로 조개탄을 사용해 공동 난방을 하는 보일러실이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본관은 학교 건축물의 외형으로는 드물게 영국 성공회의 교회 건축물 풍으로 지어졌고, 4개의 다락이 들어선 3층 실내구조와 외곽 지붕구조는 특이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영화초등학교 본관은 1930년대 말 건물 출입구 돌출 부분을 증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학교는 건물 내부 구조를 'ㅁ'자 형 평면 형태로 설계했는데 이는 요즘에도 대부분 학교가 획일적인 일자형 구조로 지어지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신선한 시도였다.
아주대학교 건축학부 전유창 교수는 2009년 '한국교육시설학회지'에서 발표한 '창영초등학교 및 영화초등학교' 논문을 통해 "영화초등학교는 현재 편복도로 기능적이고 획일화된 현재의 교육시설과 대비된다"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용할 수 있는 융통성 있는 평면 계획적 적합성과 공간의 풍부함은 현대에 건축되는 융통성 없는 기능 위주의 학교 건축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고 평했다.
1920년대 당시 조선인들의 교육열이 들끓었지만, 조선총독부는 1면 1학교 정책을 펼쳤다. 식민지 조선인들이 교육을 받아 지식인으로 성장해 자신들을 위협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영화학교는 인천 지역 여학생들이 서울의 명문 사학으로 진학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이성진 교사는 "영화학교는 미북감리교회 선교사들이 만든 학교였기 때문에 서울의 '경성 여실'이나 '배화 학당', '진명 여학교' 등과 활발한 소통을 했고, 영화학교 출신들이 이곳으로 많이 진학했다"며 "1930년대 말에는 학생 수가 400명이 넘을 정도로 학교가 커졌다"고 했다.
이에 따라 최초의 여성 박사 김활란, 유아 교육 개척자 서은숙,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 초대학장 김애마, 피아노 연주가 김영의 등 한국 사회의 선구자 중 다수가 이 시기에 영화학교에서 공부한 학생들이었다.
이성진 교사는 "인천의 근대 여성교육은 영화학교에서 시작됐고, 그것을 선도한 사람은 벵겔이었다"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그릇된 인식을 가졌던 가부장제를 혁파하고, 여성도 남성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실제 수많은 한국 여성교육의 선구자를 배출한 곳이 영화학교"라고 했다.
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