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욱의 미장센은 여전히 개성적이고 이미지는 강렬하다. 그에 반해 이야기는 언뜻 이전 작품들에 비해 헐거워진 듯이 보인다. 케이퍼와 멜로 장르를 살짝 비튼 여성들의 경쾌한 탈주극 정도로 읽힌다.
그런데 나홍진이 스크린을 넘어 현실에 해석놀이라는 판을 깔아줬다면, 박찬욱은 스크린이라는 평면 공간을 관객들에게까지 입체적으로 확대해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아가씨'를 관람하는 일이 낭독회의 확장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낭독회는 그 정체를 접어두고서라도 남성의 시선에 포획되어 대상화된 여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아가씨'의 1장이 백작이 승리하는 남성 중심의 수직적 이야기라면, 2장은 동일한 시간을 반복하며 누락된 정보들을 들려줌으로써 여성이 주도하는 수평적 이야기이다. 그리고 3장은 그 교차점에 있다. 백작(하정우)이 코우즈키(조진웅)에게 들려주는 그들만의 폭력적 낭독회를 가질 때 그것은 탈출에 성공한 듯이 보이는 두 여성 숙희(김태리)와 히데코(김민희)의 선상 정사와 데칼코마니처럼 대칭된다. 그것은 관객을 청중으로 한 히데코와 숙희의 낭독회이며, 히데코 아가씨의 낭독회는 영화 '아가씨'의 낭독회가 된다. 남성 관객은 백작이나 코우즈키가 되고 여성 관객은 조금이라도 아가씨를 꿈꿨다면, 중절모를 쓰고 콧수염을 붙인 숙희가 된다. 관객의 시선에 포획된 그들은 다시 저택의 서재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니 차분하게 다시 질문할 일이다. 과연 탈주는 가능한 것일까?
/이대연 영화평론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