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중원 설립자 호러스 알렌 서양식 별장 자리
공사로 취임 1897년 착공 가능성 설득력 높아
촬영장소로만 가끔 활용… 찾는 이 거의 없어
매국노 이완용 조카 이명구 등 여러사람 거쳐
1956년 신흥종교 단체 매입 인천전도관 신축
1980년대는 한국예루살렘교회가 차지해 사용
9명 공동소유 사유지 불구 '활용안 모색' 필요

달동네 꼭대기에 있어 인천의 중·동·남구 지역 구도심의 어지간한 곳에서는 다 보이는 이 건물은 인천 사람들의 기억에 '숭의동 109번지(실제 지번은 107번지)'라는 지번과 더불어 '전도관'이나 '예루살렘교회'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100여년 전으로 거슬러가면 서양식 주택인 '알렌 별장'이 자리를 잡고 개항기 인천을 내려다보던 자리이기도 했다.
지난 21일 인천 남구 숭의동 107번지에 있는 이 건물을 찾았다. 교회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건물 뒤편에 유일한 통로인 녹이 슨 철문으로 된 출입구가 있었다. 철문에는 '사유지로 무단출입을 금하며 관계자외 무단출입시 이전에 파괴된 시설에 대하여도 민·형사상의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라는 경고성 문구가 붙어 있었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서니 들어서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개들이 나타나 사납게 짖으며 달려들었다. 금세 경계를 푼 개들이 어디론가 사라지자 담장 안 교회 부지에 폐목재와 깨진 유리조각 등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건물 1층 빈 공간은 헌 옷을 재활용해 판매하는 회사가 사용하고 있었다.
이 업체 대표 이시형(51·가명)씨는 "임대료가 저렴한 곳을 찾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며 "나 말고도 주방가구 제조업체 한 곳이 이곳을 사업장으로 쓰고 있다"고 했다.
인천 토박이라는 이씨는 "이 주변 동네가 인천에서도 알아주는 '험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유명했는데, 지금은 비행 청소년조차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외진 곳이 돼 버렸다"며 "개인적으로 값싸게 쓸 수 있어 좋기는 하지만 고향 인천에 아직도 폐허처럼 남겨진 곳이 있다는 것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폐허가 된 이곳은 이젠 드라마나 영화 촬영장소로 가끔 사용될 뿐, 찾는 이는 거의 없다.
과거 이곳에는 교회 건물 대신 20세기 초 조선에서 활동한 미국인 호러스 알렌(Horace Allen, 1858~1932) 소유의 그림 같은 서양식 별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남구가 발행한 역사문화총서 도시마을생활사 숭의동·도화동편에 이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숭의동 107번지의 세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정리돼 있다.
책에 따르면 알렌은 주한미국공사관의 공의(公醫)로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을 설립하고 고종의 신임을 받아 전담 의사이자 정치 고문으로도 활동한 인물이다.
189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외교관 활동을 시작해 주한미국공사관의 서기관, 총영사, 공사 등을 역임하고 을사조약 체결을 앞두고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조선과 미국을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별장이 지어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은 가운데, 착공시기는 그가 공사로 취임한 1897년 7월 이후로 보는 것이 무방하다고 한다.
도시마을생활사 편찬에 참여한 이영미 박사(인하대 사학과 강사)는 "별장이 지어진 시기에 대해 1890년~1893년 정도로 언급되고 있지만 뚜렷한 근거가 없다"며 "공사가 되기도 전에 별장을 지었을 가능성보다는 그가 일인자가 된 후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알렌이 별장을 버리고 떠난 뒤에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다. 향토사학자 고 최성연 선생이 쓴 저서 '개항과 양관역정'에는 이 곳을 '공사 집', '선교사 집', '의사 집', '이명구 별장', '서병의 별장' 등으로 불렀다고 나와있다.
우선 이명구(1892~1975)는 매국노 이완용의 조카다. 그는 대원군 집권기에 활약한 관료 이호준(1821~1901)의 서자인 이윤용(1858~1926)의 외아들이다.
이명구가 이완용의 아들이라고 나와있는 것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고 이 박사는 설명했다.
이명구 다음으로 이 건물을 차지한 사람은 서병의(1893~1945)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인천의 대상인 서상집의 장남이자 초창기 축구 심판이었다고 한다.
알렌 별장은 학교의 교사(校舍)로도 자주 사용됐다. 1930년대 말 이 별장은 학교로 모습을 바꾼다. 이순희(1905~?)는 영화여고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삼남매를 낳은 후 이혼하고 1936년 불우한 소녀 3명을 데리고 별장에서 계명학원(啓明學院)을 시작한다.
1938년 남동생과 함께 별장과 대지를 매입해 학교를 확장하고 계명학원은 4년제 소학교가 됐고 학생수가 700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최성연 선생의 책에는 이곳이 경찰전문학교와 중앙대학교 무선고등학교로도 사용됐던 것으로 나온다. 뒷받침할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이 마을 인근 사람들에게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956년에는 교회로도 모습을 바꾼다. 박태선이 창시자인 신흥종교 단체가 이 건물을 매입한다. 인천은 이 신흥종교를 가장 빨리 받아들인 도시였다. 인천전도관은 건물을 250만원에 매입해 기존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올렸다. 그해 12월 991.7㎡ 규모로 예배당을 완공했고, 이듬해 2층을 올렸다고 한다.
이 교회는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1978년까지 20여년간 자리를 지켰다. 이 종교단체는 부천에 '신앙촌'이라는 집단 거주지도 만드는 등 교세가 성장하다 사법 당국의 수사를 받으며 기울기 시작한다.
인천전도관이 떠난 후에는 또 다른 종교단체가 이곳을 차지한다. 오늘날 예수중심교회로 불리는 한국예루살렘교회다. 이 교회는 이초석 목사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그는 귀신 축출, 기복주의를 강조하며 정통 기독교와 입장을 달리하는 부분이 많아 교단에서 제명된 것으로 전해진다.
1980년대 세워진 이 교회는 매년 성장을 거듭해 1988년에는 5천명, 1991년에는 1만명으로 교세가 확장된다. 1990년도에는 서울로 진출한다.
일요일이면 예배를 보러 다니는 사람들로 인해 주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초대 남구의회 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마을 주민 정창근(82)씨는 "28인승 버스 30대가 매일 좁은 언덕길을 오르내리느라 기존 주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었다"며 "하루는 예배가 있는 날 동네에 불이 났는데, 버스들 때문에 소방차가 진입하지 못해 소실되는 일이 빚어져 마을 주민들의 민원이 극에 달했다"고 당시 기억을 전했다.
이 부지는 현재 개인 9명이 공동 소유한 사유지인 탓에 지자체가 개입할 여건이 안된다.
근대건축전문가인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숭의동 107번지 일대는 서울로 가던 길목이었던 데다, 인천 전역이 보이는 훌륭한 경관을 갖추고 있어 재력가의 별장으로, 또 종교시설 부지로 선호됐던 장소적 특성을 지닌다"며 "민간 소유의 부동산이긴 하지만 민간과 관이 함께 활용방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글 =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