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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중구 남북동에 위치한 '조병수 가옥'은 조선 말기에 지어진 옛집으로, 집을 중심으로 뒤로는 산이 펼쳐져 있고, 좌·우로는 산맥이 흐르며, 대문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어 선조들이 선호했던 집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현 주인 고조할아버지가 지은 'ㅁ' 형태… 섬 치고는 큰 규모
조씨 일가 안채 거주… 사랑채는 '한옥체험' 게스트하우스로
사람이 계속살면서 보존해온 탓 긴 세월 집 본연의 기능 유지
외부인 접근쉬운 담장 밖 사랑채, 독립운동 모의 장소로 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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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은 당시의 건축 양식과 함께 그곳에서 산 사람들의 삶의 양식도 보여준다. 현재까지 사람이 살고 있다면 학문적 측면과 함께 기능적 관점에서도 집 본연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인천 중구 남북동 868의 '조병수 가옥'은 조선 말기에 지어진 옛집으로서, 현재도 사람이 살고 있다. 본연의 기능적 역할과 더불어 건축 당시의 양식, 시대상 등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집 중 하나다.

'조병수 가옥'은 1890년 영종도와 분리된 섬이었던 용유도에 지어졌다. 이 집은 현 주인인 조병수(71) 씨의 고조할아버지인 고(故) 조형규 씨가 지었다. 이 집은 1997년 7월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6호로 등록됐다. 지금은 조 씨와 자녀 등 6대째 대를 이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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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수 씨의 선조들이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장례에 참석한 뒤 남긴 가족사진.

지난 25일 조 씨의 집을 찾았다. '조병수 가옥'은 인천 중구 영종도 용유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1㎞가량 떨어진 숲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집을 중심으로 뒤로는 산이 펼쳐져 있고, 좌·우로는 산맥이 흐른다. 대문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선조들이 집을 지을 때 가장 선호한 장소라는 것이 집주인의 설명이다.

조 씨는 "어른들한테 전해 듣기로는 고조할아버지께서 용유도에 터를 잡으시면서 바깥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안쪽에서는 밖이 잘 보이는 곳을 찾은 곳이 이곳이었다고 한다"며 "이 안에 들어와 있으면 어머니의 품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조병수 가옥'은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 전형적인 주거 형태인 트인 미음(ㅁ)자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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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수 가옥은 지어질 당시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 주거 형태인 트인 미음(ㅁ)자 구조이다.

정문에서 바라볼 때 기역(ㄱ)자 형태의 건물 두 채가 마주 보고 있는 모양의 집이다. 건물 두 채 사이의 빈 공간은 천장이 없는 마당이다.

안채 왼쪽에는 부엌과 다락방이 있다. 거실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부엌과 맞닿은 3개의 방이 있고 우측에는 조 씨의 방이 배치돼 있다. 안채에는 조 씨 일가가 거주하고 있다.

대문이 있는 사랑채는 현재 여행객들이 머무르며 한옥체험을 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Guest House·여행자 숙소)로 활용되고 있다.

조 씨는 "이 집이 내륙에 있는 집들과 비교할 때 큰 형태는 아니지만, 용유도가 섬인 점을 고려하면 섬에 있는 다른 집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집"이라고 설명했다.

또 조 씨는 "집이 오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육지에서 떨어진 섬에 있었다는 지리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사람이 계속 집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사람이 집에 살면서 낡은 부분은 고쳐나가고, 손을 봤기 때문에 이 집도 무너지거나 훼손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병수 가옥'의 특징 중 하나는 집의 경계라고 볼 수 있는 담장이 사랑채 건물보다 안쪽에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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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경계라고 볼 수 있는 담장은 사랑채 안쪽과 연결되는 독특한 양식으로 지어졌다.

도병욱 동국대학교 불교건축문화연구소 연구원은 "옛집들은 대문의 개념을 안채로 들어가는 중간 단계의 문 정도로 인식해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며 "조병수 가옥과 같이 바깥채(사랑채) 건물이 담보다 밖에 있다는 것도 앞마당 전체가 자기 땅이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랑채가 바깥에 배치돼 앞쪽으로 별도의 담장이나 문이 설치되지 않았다는 것은 외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며 만나는 공간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조병수 가옥'은 1919년 3·1 운동과 맞물려 용유도에서 일어난 3·28 독립운동을 모의한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조 씨의 당숙 뻘 되는 조명원은 서울에서 1919년 3·1 독립선언식에 참여한 뒤, 용유도로 들어와 이 집의 사랑채에서 조종서·문무현·최봉학 등과 함께 비밀 항일투쟁단체인 '혈성단(血成團)'을 조직해 용유도 3·28 독립운동 등을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용유도 3·28 독립운동은 1919년 3월 28일 조명원 등 혈성단이 주축이 돼 용유도 주민 150여 명이 한 만세 시위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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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수 가옥 안채의 마루에 서재처럼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현재 '조병수 가옥'에는 조 씨 일가가 안채에 거주하고 있으며, 사랑채는 한옥체험 형태의 숙박업소인 '오가물 게스트하우스'로 운영 중이다. 오가물은 조병수 가옥이 있는 지역 일대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조 씨는 "이 집은 1890년에 지어진 이래 사람들이 계속 살면서 집의 생명도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외국인들을 비롯해 한옥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이 집에 와서 한옥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병욱 연구원도 "조병수 가옥은 섬이었던 용유도에 상대적으로 큰 규모의 기와집이 지어졌다는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당시 배를 이용해 집을 짓는 목재나 기와 등을 옮겨온 점 등으로 미뤄 집주인이 상당한 재력을 갖췄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고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조병수 가옥은 사람이 계속 살면서 건물이 유지됐다는 데 보다 큰 의미가 있다"며 "조병수 가옥이 단순히 오래돼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의 기능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더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 = 신상윤기자 ssy@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