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륭원 행차 기록~화성 축성 전과정 까지
한글·채색그림·세밀한 묘사 궁금증 해소
기존복원과 20여곳 넘게 차이… 고증 필요
편찬시기 견해달라 정확한 연대 연구해야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인 조선왕조 의궤 중 그 실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정리의궤 실물이 처음으로 발견되면서 학계에는 큰 파장이 일고 있다. 정리의궤에는 기존의궤의 핵심 사안이 정리돼 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단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었던 '동장대시열도(東將臺試閱圖)' 등이 수록돼 있다.
또 순 한글로 기록돼 있으며, 수원화성 시설물의 그림을 채색한 전 세계 유일본이 포함돼 있어 학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정리의궤 발견 이후 현재까지 밝혀진 사실들을 정리해봤다.
#서서히 드러나는 정리의궤의 비밀
'정리의궤(整理儀軌)'는 총 48책(현재의 권과 같은 의미)으로 구성돼 있으며, 현재 프랑스 국립 동양어학교 (Institut Nationale des Langues et Civilisation Orientales)에 12책, 프랑스 국립도서관(Bibliothque Nationale de France·BNF)에 1책이 각각 보관돼 있다.
특히 정리의궤는 기존의 한문 대신 순 한글로 작성돼 있으며, 그 중에서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 중인 정리의궤 '성역도(城役圖)'는 전 세계 유일본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화성과 부속건물들의 채색 그림이 들어 많은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동안 문화재청과 수원시는 1801년에 간행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통해 수원 화성을 완벽하게 복원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화성성역의궤는 화성 축성의 전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한 목판 인쇄물이다. 그런데 정리의궤 성역도는 왕실의 화가인 도화서 화원들이 손으로 직접 그린 것으로, 그 세밀함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더구나 흑백으로 인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육안으로 구분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았는데, 이번에 정리의궤 발견으로 인해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궁금증들이 대거 해소된 것이다.
한편 현재 복원된 수원 화성이나 화성행궁과는 차이 나는 부분이 20여 곳이 넘게 발견돼 향후 많은 연구와 고증을 거쳐 제대로 된 복원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수원시 관계자는 "정리의궤에 대한 연구·조사를 위해 조만간 프랑스 실사단을 파견한 뒤 영인본 제작 및 전시 등을 구상하고 있다"며 "정확한 연구가 끝나면, 1900년대에 촬영된 사진, 기존의 화성성역의궤, 정리의궤를 종합적으로 비교·검토해서 제대로 된 화성·화성행궁 복원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 누가, 언제 만들었을까?
우선 학자들은 책 이름이 '정리의궤'인 이유에 대해 정조 임금이 만든 의궤 편찬 기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 교수는 "정조는 1794년 12월에 현륭원 행차를 주관하는 '정리소(整理所)'를 설치했고, 이듬해 혜경궁 홍씨와 함께 현륭원을 다녀왔으며, 혜경궁의 회갑잔치도 벌였다. 그리고 일련의 과정을 '의궤'로 만들기 위해 정리의궤청(整理儀軌廳)을 추가 설치했다"며 "결국 정리의궤라는 서명은 정리의궤청에서 간행한 의궤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밝혔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측은 정리의궤의 간행일을 1796년으로 보고 있다. 이는 책의 내용 중 정조의 행차와 혜경궁 회갑연 등이 1795년에 치러졌고, 바로 다음해에 이를 책으로 펴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학자들의 견해는 다르다.
옥영정 교수는 "원행과 화성축성이 끝난 후인 1797년 9월 이후부터 화성성역의궤 편찬이 완료된 1800년 5월 사이에 편찬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참고해봤을 때 기존에 있던 을묘정리의궤를 교정하는 차원에서 정리의궤를 만들었으며, 이를 대전(大殿)과 중궁전(中宮殿) 등에 보냈다는 기록으로 봐서 1827년(순조27)에 제작을 했고, 이를 순원왕후(순조의 아내)를 위해 한글본 의궤를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책을 제작한 정확한 연대측정은 연구가 좀 더 필요하겠지만, 정리의궤는 어람용(御覽用) 의궤라는 사실은 분명하며, 한글로 작성된 이유는 당시 왕후와 내명부에 있는 여성들이 한문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해 오히려 한글에 익숙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선회기자 ks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