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ㅁ'형 한옥 구조 황해도 소나무 가져다 만든 대들보·서까래 '눈길'
"손님방 8~9개 정도와 비밀공간 있었다" 누군가 숨겨준 역할한 듯
1885년 인천객주상회 만들어 일본화폐 수취거부운동 벌이며 저항
민족상인과 정보공유 계몽·개혁운동 펼쳐… "객주들 재평가 필요"

인천이 수도의 관문인 데다 상하이와 일본으로 항해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상선 대부분이 인천에 기항했기 때문이다. 1897년 교역 총액을 살펴보면 인천항의 총 교역량은 941만4천 달러로, 부산항 742만7천 달러, 원산항 212만5천 달러보다 훨씬 많았다. 조선 무역에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셈이다.
이처럼 인천항을 중심으로 수출입 화물이 급격히 늘어나자 개항장을 중심으로 객주(客主)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객주(客主)란 전국의 상품 집산지에서 물건을 맡아 팔거나 매매를 주선하고 수수료를 받는 것은 물론, 화물의 보관이나 운송, 숙박업, 기본적인 금융 서비스까지 제공한 중간상인을 말한다. 요즘 상법으로 치면 대규모 위탁매매업자다.
이러한 객주는 조선 후기부터 포구와 같은 교통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개항 뒤에는 인천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개항장에서 영업하던 객주는 내외국 상인들의 위탁판매를 통해 구문(口文)을 받는 한편, 어음의 인수와 할인 등의 금융업을 통해 자본을 축적했다.

1897년 3월 독립신문에서는 인천항에서 적어도 80~90명의 객주가 활동하고 있었고, 같은 해 인천항 감리인 강화석의 보고서는 96명의 객주가 활동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인천 중구 내동을 중심으로 객주들의 가게인 '객주가'가 많아지게 됐다. 김윤식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는 "당시 중구 내동 주변에는 정미소나 객주가, 대규모 기와집 등 인천에서 내로라하는 큰 집들이 몰려 있었다"며 "인천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이 내동 근처였기 때문에 당연히 벌어지는 현상이었다"고 설명했다.
19일 당시 객주가였던 중구 내동에 위치한 '월아천'을 찾았다. 지금은 한식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등기부 등본상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24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당시 사진 등을 살펴보면 진짜 건축연도는 1890년대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날은 폭염주의보가 내릴 만큼 더운 날이었지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지난 2006년 이곳을 인수한 박정숙 사장은 "밖에서 바람이 하나도 불지 않는 날에도 우리 가게에는 항상 바람이 들어온다"며 "손님이 많지 않으면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틀지 않아도 될 정도다"라고 설명했다.
전형적인 'ㅁ'형 한옥 구조로 지어진 이 건물은 솟을대문과 중문이 있고, 본채·사랑채·꽃담으로 이뤄지는 궁궐 형태를 갖추고 있다. 집안에 들어가니 굵은 대들보와 서까래가 눈에 띄었다. 집의 대들보와 서까래에 쓰인 나무는 황해도에서 공수한 소나무들을 사용했다고 한다. 못을 치지 않고 나무와 나무를 잇고, 엮은 것도 이 집이 갖고 있는 특징이다.

박 사장은 "이 건물이 객주가로 사용됐던 것처럼 방이 많은 편이었다"며 "안방을 빼고 작은 평수의 손님 방이 8~9개 정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객주들이 상거래는 물론 지방 상인들이 인천에 와서 묵어가기 위한 숙박업까지 겸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이 집 바깥벽 쪽에는 3.3㎡도 안 되는 비밀공간이 있었다고 한다. 안채로는 연결이 안 되고 건물 옆 3m 길이의 낭떠러지로만 나갈 수 있게 만든 숨은 공간이었다. 발견 당시 방바닥에 화문석이 깔렸던 것을 미루어 짐작하면 누군가를 숨겨주기 위한 공간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같이 대규모 주택을 소유하고 있던 당시 객주들은 계속된 일제의 상권 침탈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개항장의 수출입상품은 대부분 자본력에서 앞선 외국 상인이 독점해 유통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885년 인천항의 객주들은 일본인 등 외국 상인에 대항해 지역 상권을 보호할 목적으로 '인천객주상회(인천 상공회의소의 전신)'를 만들었다. 이들은 1902년 '일본제일은행'이 부산과 인천 등을 중심으로 조선 정부의 허락 없이 일본 화폐를 유통시키자 수취 거부 운동으로 이에 맞서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이후 이들의 저항은 계속될 수 없었고, 1915년 조선총독부는 이들 단체를 강제적으로 해산했다.
경인여자대학교 윤호(부동산학과) 교수는 "개항 당시 인천의 객주들은 민족상인들과 상업정보를 공유하고, 계몽과 혁신을 담당하며 자본을 집중해 일본 상인에게 대항했다"며 "이러한 이들의 활동은 전국의 민족 상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일본 상인의 상권침탈에 저항하며, 민족상인들을 대상으로 계몽과 개혁운동을 전개한 이들의 활동은 반드시 재평가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