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직선이 만든 질서 위에서 그들의 탈출은 평온하다. 감염된 소녀가 열차 안으로 뛰어들지만 않았어도, 아마 그들은 모두 무사히 부산에 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수면에 떨어진 잉크 방울처럼 순식간에 승객들이 감염되며 일어난 혼란은 그들의 안전을 위협한다. 점과 점 사이를 어긋나고 가로지르며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확장되는 감염은 직선의 질서로는 감당할 수도, 파악할 수도 없는 공포이다. 평면 위의 얼룩이며, 직선에 일어난 균열인 것이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은 웰메이드 장르영화다. 애니메이션 감독이라는 그의 출신과 경력에 따른 우려와 기대는 모두 옳았다. 간간이 눈에 띄는 만화적 쇼트와 연출이 이질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스토리텔러로서 그의 능력은 유감 없이 발휘됐다.
서열화된 교실 내부를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낸 '돼지의 왕'이나 수몰 예정 지역에 퍼진 사이비 종교를 다룬 '사이비'에서 보여준 절망적 세계관은 탈색되고, 캐릭터들을 생동감 넘치게 만들었던 인물 각각의 다면적 성격과 내적 서사는 과감히 생략했다.
그 대신 그가 장착한 것은 스펙터클이다. 강화유리를 뚫고 뛰어내리는 좀비 떼나 좀비들로 가득한 열차 칸을 통과하며 펼치는 호쾌한 액션은 장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상호 감독은 사회를 향한 시선과 인간에 대한 성찰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감염으로 인한 괴물들의 존재는 정부의 무능을 드러내고 자본의 부도덕성을 폭로한다. 안전을 보장해 주리라 기대했던 군인들이 오히려 좀비가 되어 승객들을 공격해오는 모습은 공권력에 대한 공포를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부산행'은 '탈출기'에 가깝다. 정작 그들이 도망쳐야 하는 것은 좀비가 아니라 권력과 자본이다. 금세 끝날 것 같던 그들의 탈주는 마치 이스라엘 민족의 엑소더스처럼, 출발과 도착 사이의 공간을 떠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했듯 손에 피를 묻힌 자들은 탈락하고 소녀와 임산부만이 부산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과정을 가족 서사로 봉합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