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 학곡리 적석총 유적 전경
연천 학곡리 적석총 유적 전경. /경기문화재단 제공

연천 삼곶리·학곡리 발굴잇따라
학술적 가치 인정 道기념물 지정
소서노·온조 이야기 풀어줄 열쇠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991년부터 10개년 계획으로 '군사보호구역 문화유적 지표조사 계획'을 수립하고, 경기도와 강원도의 군사분계선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지표조사를 실시해 667건의 유적을 발견했다. 발견 유적 중에서 경기도에 속한 연천, 파주, 김포에서 발견된 것이 412건이었고, 그중에서 연천 소재 93개소의 유적과 파주 소재 134개소의 유적은 학술적 가치도 남달랐다.

특히 육계토성, 파주 동파리 마애사면불,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許浚)의 무덤, 덕진산성과 호로고루 등의 고구려 성곽, 연천 부곡리 분청사기 가마터 등의 발견은 임진강 유역이 한국고고학의 신천지로 주목받게 했다.
오늘 소개할 연천 삼곶리 적석총도 군사보호구역내 지표조사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유적이다.

지표조사 첫해인 1991년에 발견되었고, 다음해인 1992년 바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유적이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사결과, 모래언덕을 평탄하게 만든 다음 강돌을 이용하여 무덤칸과 봉분을 만든 적석총이라는 사실과 함께, 백제식의 토기가 출토되어 백제고분이라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기존에 유사한 형식의 백제적석총이 발굴되었지만, 연천 삼곶리 적석총은 제사공간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일 형식의 무덤에서는 발견된 바 없는 쌍분(雙墳)이었고, 무덤칸의 형식도 비교적 뚜렷하게 확인되었다. 이런 학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1994년에 '연천 삼곶리 돌무지무덤'이라는 명칭으로 경기도 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되었다.

1996년 7월 임진강 유역에 집중호우가 내려, 임진강이 범람하여 주변 일대가 막대한 수해를 입게 되자, 임진강 유역의 제방에 대한 대대적인 개수 공사가 계획되면서, 경기문화재연구원은 2002년 연천 학곡리 소재 적석총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조사결과, 연천 삼곶리 적석총과 유사한 형식이지만 무덤칸을 최소 5개 이상 연결하여 하나의 무덤을 조성한 다곽식(多槨式) 적석총이라는 사실과 함께, 출토유물을 통해 연천 삼곶리 적석총보다는 이른 시기에 조성된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어쨌든 이 연천 학곡리 적석총도 학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6년 경기도 기념물 제212호로 지정됐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시조 주몽이 졸본부여로 내려와 소서노(召西奴)와 재혼해 비류와 온조를 낳았는데, 부여에서 첫째 아들인 유리가 내려오자 비류와 온조는 남쪽으로 내려가 백제를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고대사학자들은 온조가 내려와 초기에 정착한 곳이 한강유역일 것이라 보았고, 그것이 통설로 인정되고 있었다.

그런데 임진강 유역의 연천 삼곶리와 학곡리에서 고구려계통의 적석총이 발굴되고 임진강 일대가 백제적석총의 중심지역임이 밝혀지자, 학계 일각에서 기존의 통설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임진강 유역의 적석총이 서울 강남에 자리한 석촌동고분군보다는 앞선 시기에 조성된 것이고, 지금의 서울시를 관통하는 한강 본류와 그 지류에는 석촌동고분군을 제외하고는 이른 시기의 고구려계 백제적석총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조가 임진강 유역에 한동안 머물다가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이런 견해는 온조가 낙랑과 말갈의 잦은 침략 때문에 천도했다는 기록으로 옹호되었다.

임진강 유역의 고구려계통의 적석총과 임진강 중류에 자리한 육계토성은 의문 속의 초기백제사를 새롭게 규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 식민사관에 의해 전면 부정되었던 3세기 중엽 이전의 백제의 역사가 허구가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물적 증거'이기도 하다.

이처럼 학술적 가치가 충분하기에 육계토성, 연천 삼곡리 적석총, 연천 학곡리 적석총은 그 존재가 알려지자마자 바로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됐던 것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드림 소사이어티(dream society)이다. 사실(事實)을 정보(情報)로 가공하고, 그 정보에 스토리를 입혀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런 이미지를 통하여 본래의 가치를 배가시키는 시대이다.

그리고 스토리텔링이 문화자산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 시대이다. 이런 시류에 우리는 아직도 지정과 정비만으로 문화유산 정책의 소임을 다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온조와 소서노의 이야기가 새로운 버전으로 재등장할 때, 그들의 역사적 무대가 '경기의 땅'으로 설정되길 바라고, 그것을 위한 '이야기 만들기'에 우리 모두 소홀하지 않았으면 한다.
201608010100005210000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