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혁 한신대 교수_인터뷰 공감22
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교수는 수십년 간 정조와 수원화성에 대해 연구해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었는데, 지난 6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정리의궤 '성역도'를 국내 최초로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수원 화성과 관련된 그림들이 여러 장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그중에서도 장용영(壯勇營·정조의 호위부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 답게 정조가 군대를 시열하는 모습을 담은 '동장대시열도(경인일보 7월 5일자 1면 보도)'가 가장 인상 깊었다고 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된 성역도서 채색 화성그림 처음 봤을때 '충격'
조선시대 군사정책 연구 부족한 역사학계… 동장대시열도의 발견 중요
프랑스와 자료공유 노력·의궤 내용 기반으로 新문화콘텐츠 추진하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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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가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 '수원'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학도가 있다. 86세대 운동권 학생들이 으레 그러하듯 대학원에서 사학을 전공한다 하면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독립운동사'를 전공하는 것이 당연시 되던 시절, 혼자서 '정조'를 연구해보겠다고 했다가 이단아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조선 정조대 장용영(壯勇營·정조의 호위 부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정조와 관련된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전문가 반열에 올랐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김준혁(48) 교수의 이야기다.

그가 지난 6월 27일 프랑스 동양어학교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정조대에 만든 정리의궤(整理儀軌)의 실체를 발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100여 년 동안 머나먼 이국에서 잠자고 있던 조선왕실의궤가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16년 '수원화성 축성 220주년'과 '수원화성 방문의 해'를 맞아 정조가 보내준 선물은 아닐는지.

-정리의궤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뜨겁다. 지난 7월 27일 수원시가 개최한 '프랑스 소재 한글본 정리의궤 토크 콘서트'에는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수원시와 수원시민들이 문화적 소양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귀한 자료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문화재의 가치가 현저히 떨어지게 마련이다. 정리의궤는 비록 타국에 있지만, 언론에서 정리의궤에 대한 보도가 수차례 이뤄진 이후 학자들의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특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정리의궤 제39권 성역도(城役圖)는 전 세계 유일본으로 화성과 행궁 건물, 정조대의 군사·문화행사들을 한글과 함께 채색으로 그려 놓은 그림이 79점이나 들어있어, 많은 부분의 역사를 뒤바꿔 놓을 만큼 충격적인 자료다. 의궤를 가지고 토크콘서트를 열었는데, 행사장이 꽉 차서 추가 좌석을 놓을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던 것은 학자들 뿐만 아니라 수원 화성을 사랑하고 연구하는 시민들이 그 정도로 많다는 방증이다."

- 언론에서 많이 다뤄지기는 했지만, 정리의궤의 내용에 대해 다시 한 번 소개해달라.

"정리의궤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정조대의 의궤편찬기구인 정리의궤청(整理儀軌廳)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전체가 48권으로 제작됐으며, 현존하는 것은 13권으로 프랑스 국립동양어학교에 12권이, 나머지 1권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있다. 동양어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은 텍스트(한글)로만 이뤄져 있으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것은 화성과 행궁, 주요 시설물을 그린 도설(圖說)로 그림과 한글로 이뤄져 있다. 이 책은 크게 보면 '정조의 수원행차'와 '화성 성역'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수원행차의 기록이 1797년(정조 21)에 마감된다. 따라서 이 책은 1796~1797년까지의 화성행차 내용과 1796년 9월에 완공된 화성의 축성 과정을 정리해 1798년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혹은 왕비인 효의왕후에게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역도에 나타나는 채색본 그림들은 화성이 완공된 이후인 1797년에 그려지고, 이와 함께 화성행차 기록을 한글로 정리해 1798년에 최종 완성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글과 도화서 화원이 그린 그림이 들어있다는 것으로 볼 때 왕실에 진상하기 위한 어람용(御覽用)으로 제작된 것이며, 현존하는 최고(最古) 한글본 의궤로서 국보급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 프랑스와는 이미 외규장각 의궤 반환문제 때문에 수 십 년 간 시끄러웠었는데, 왜 이제서야 정리의궤가 발견된 것인가.

"1970년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사서로 근무하던 고(故) 박병선 박사께서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약탈한 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던 강화도 외규장각 의궤 297권의 목록을 찾아내 정리한 바 있고, 끈질긴 협상 끝에 조선왕조 의궤 297권이 지난 2011년 영구임대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됐다. 그런데 정리의궤는 병인양요와 관계없이 초대 한국 주재 대리공사로 임명됐던 빅토르 꼴랭 드 쁠랑시(Victor Collin de Plancy·1853~1922)라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수집해 이를 자신의 모교인 프랑스 국립동양어학교(12권)에 보냈고, 나머지 한 권(39권 성역도)은 경매상을 통해 판매했다가 그 경매상이 죽기 직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해 도서관 측이 이를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니까 그동안 우리나라 학자들이 약탈 된 외규장각 의궤에 몰두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정리의궤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것이고, 특히 정조대의 역사를 전공한 이가 많지 않아 그 가치를 알아본 사람도 없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정리의궤가 있다는 사실은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1865~1935)이 1901년에 발행한 '조선서지(朝鮮書誌)'에 이미 드러나 있는데도, 100여 년 동안 프랑스를 직접 방문해 실물을 확인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우리 학계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

-그럼 본인은 어떻게 하다가 더불어민주당 안민석(오산) 의원 등과 함께 정리의궤를 찾으러 프랑스까지 가게 됐나.

"지난 2010년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한국학중앙연구원 옥영정 교수로부터 한글본 정리의궤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당시 옥 교수는 복제된 마이크로필름 등을 통해 프랑스 국립동양어학교에 소장된 정리의궤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분도 직접 실물을 확인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후 언젠가는 정리의궤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2013년 문정왕후 어보 환수 활동을 함께 추진했던 안 의원에게 정리의궤 이야기를 꺼냈더니 흔쾌히 동행하자고 했고, 올해에 그것이 현실화 됐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당초에는 동양어학교에 소장된 12권짜리 정리의궤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려고 했던 것인데, 동양어학교 도서관 측에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정리의궤 1권이 더 있는데, 그 책에는 그림도 들어있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곧바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달려가 정리의궤를 보여달라고 수 차례 요청했고, 그 자리에서 정리의궤 '성역도'를 보고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 한글본 의궤도 놀라운데 더구나 채색된, 난생 처음 보는 화성 관련 그림들이 연속해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수 십 년 간 정조와 화성을 연구한 사람으로서 여태껏 경험 중에서 가장 큰 충격이었다."

김준혁 한신대 교수_인터뷰 공감7

-그렇다면 정리의궤 중에서 본인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

"전반적으로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 많아 모두 중요하지만, 정조 연구자로서 중요한 것을 딱 한 개 꼽으라면 '동장대시열도(東將臺試閱圖)'를 들 수 있다. 동장대시열도는 1796년(정조 20) 1월 22일에 동장대에서 있었던 군사들의 시열(사열)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공개된 것이 없었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조선시대 군사정책 부분이다. 군대 체제와 훈련 방식 등에 대한 세부적인 연구가 매우 부족하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면서 군대가 해산당했고, 그와 관련된 기록 상당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에 함께 편집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국왕의 군례에 대한 내용이 일부 나와 있으나 너무 적은 편이다. 그런데 정리의궤에 정조가 직접 군사훈련을 주관하고 군인들을 시열하는 그림이 나오게 되면서 조선시대 군사훈련에 대한 체계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된 화성부성조도(華城府城操圖)와 8폭병풍의 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操圖), 화성성역의궤의 연거도(煙炬圖)와 함께 동장대시열도를 연구하면 당시 화성에서의 군사훈련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고 본다."

- 낙성연도(落成宴圖)도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단 낙성연도는 화성성역의궤에도 존재하는 것인데, 그동안 흑백으로 인쇄된 그림만 전해지다 정리의궤를 통해 채색 그림이 처음 공개됐다. 이 그림을 통해 상하동락(上下同樂)을 중시한 정조의 정신을 볼 수 있다. 낙성연도는 화성 축성이 마무리 된 후인 1796년 10월 16일 화성행궁 낙남헌 앞마당에서 개최된 낙성연 행사의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한 그림이다.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나와있는 낙성연도의 틀은 기본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 낙성연도에 나오는 채붕(彩棚·누각형태의 무대)과 사자놀이 역시 동일하다. 화성성역의궤에도 당시 채붕 안에서 광대들이 들어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표현돼 있다. 그런데 정리의궤에는 채붕 등의 모습이 매우 정밀하게 묘사돼 있고, 연희를 벌이는 무용수들이나 악사, 광대 들의 의상이 색깔이 뚜렷하게 드러나 당시 조선사회의 복식사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될 예정이다. 한편 동장대시열도, 낙성연도 말고도 '연거도(演炬圖·정조시대 야간 군사훈련 그림) '가 매우 의미 있는데, 낙성연도처럼 그동안 단색 목판본만 전해지다가 이 역시 채색 그림이 나타나면서 당시 군사들이 야간에 얼마나 불을 밝히며 훈련에 임했는지 모습을 상세히 알 수 있게 됐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정리의궤의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 정리의궤를 발견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그간의 연구성과와 혹시 새롭게 찾아낸 부분이 있는가?

"성역도에 들어있는 화성행궁의 주요 시설물 즉 봉수당, 장락당, 유여택, 복내당, 낙남헌, 노래당, 미로한정 등은 모두 처음 발견된 그림들이다. 이 건물들은 다른 어떠한 기록에도 단독으로 그려진 적이 없는 것들이다. 지금까지는 화성성역의궤에 작게 실려있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 건물들은 모두 국왕이 친히 머물렀던 공간으로, 정치를 주재하거나 휴식을 취했던 공간이다. 화성행궁 전체가 587칸으로 건축됐는데, 정리의궤에는 관리들의 집무 공간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철저하게 국왕 혹은 국왕과 버금가는 왕실 인물들의 친림(親臨) 건물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정리의궤의 제작 의도가 혜경궁 혹은 효의왕후에게 화성행궁의 주요 건물의 모습을 알려주기 위했던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 앞으로 정리의궤와 관련된 행사나 계획이 있는가.

"현재 정부기관인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국립중앙도서관과 협의해 프랑스 동양어학교와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자료를 공유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 수원시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정리의궤를 영인·복제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적극 도울 생각이다. 또 정리의궤에 대한 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수원시와 협력해 올해는 국내 연구자들 간의 학술대회를 진행하고 내년에는 프랑스 측 학자들과 함께 국제학술대회를 진행하려고 한다. 또 정리의궤 내용을 기반으로 새로운 문화콘텐츠 개발을 적극 추진할 생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연구하다보면 무궁무진한 콘텐츠가 나올 것이다. 선조들이 물려준 세계적인 문화유산의 가치를 깨닫고 이를 의미 있게 개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문화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이다."

동장대시열도 1

■ 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교수는?

-1968년 2월 9일 출생
-수원 파장초·수성중·수성고 졸업
-1986년 중앙대 사학과 입학·1993년 졸업
-1999년 중앙대 대학원 사학과 석사 졸업·2007년 동 대학원 박사 졸업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
-2009~2011년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
-2011 ~2013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2014~현재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저서 : '수원화성' '정조 이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전투' 등

글/김선회기자 ksh@kyeongin.com·사진/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