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입학위한 '소과 응시' 준비하던 곳
中서 온 공자상, 개경 옮기기전 임시 봉안
명륜당·동재 서재 뒤 대성전 '건축적 위계'
대성전 서쪽 '성전약수' 가뭄에 말라 씁쓸
높은 교육열에 영향… 유림회 활동도 활발
16세기 중엽부터 생긴 서원은 향교와 기능은 유사하나, 사립교육기관이라는 차이가 있다. 고려 말과 조선시대 사람들은 마을 서당 등에서 천자문 같은 기초 학문을 익힌 뒤 향교에서 당시 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한 소과(小科) 응시준비를 했다.
고구려는 국립교육기관인 태학을 운영하는 등 유학은 삼국시대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었지만, 조선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 때다.
유학자 안향(安珦·1243~1306)은 고려 충렬왕 12년인 1286년 왕을 따라 원나라 연경(베이징)에 가서 공자와 주자(朱子)의 상을 그리고,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해 우리나라로 들여왔다.
안향이 그려온 우리나라 최초의 공자상을 수도 개경으로 가지고 가기 전 임시 봉안(奉安)했던 장소가 바로 교동향교다. 이후 안향은 김문정(金文鼎) 등을 보내 원나라에 가서 선현들의 상과 제기(祭器)를 구해오도록 하고, 이 또한 교동향교에 임시 봉안했다.
교동향교에 임시 봉안했던 공자상 등은 1303년 개경으로 모셔진 것으로 알려졌다. 공자와 유교 성현을 받드는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하는데, 교동향교는 처음으로 공자를 모셨다 하여 '수묘(首廟)'라 불렸다.
공자상이 맨 먼저 교동향교로 들어온 까닭은 서해에서 배를 타고 수도 개경으로 들어가는 예성강 입구에 위치한 교동도의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은 교동도를 군사요충지이자 해상무역의 거점으로 만들기도 했다. 교동도에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수도로 가는 중국 사신을 응접하는 중간 기착지인 대빈창(待賓倉)이 있었다.
교동향교가 생기기 전에도 중국 사신이 공자에게 제를 올리던 문묘가 있었다. 교동향교는 1741년 화개산 남쪽의 현재 위치로 옮긴 이후 9차례 중수했다. 향교를 옮긴 이유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관청이 화개산 북쪽인 구읍리에서 남쪽의 읍내리로 옮기면서 향교도 따라온 것으로 추정된다.
입구인 홍살문(紅箭門)을 지나 교육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기숙사 역할을 한 동재·서재가 전면에 배치됐다. 명륜당 뒤로는 제향공간인 대성전(大成殿)이 가장 높은 축대에 위치해 건축적 위계를 확실히 하고 있고, 성현의 위패를 모신 동무·서무가 축대 아래 좌우로 배치돼 있다. 동재 뒤쪽 구석에는 제기고가 있다.
향교건축에서는 교육공간이 앞에 있고, 제향공간이 뒤에 있는 구성을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라 하는데, 교동향교는 이를 모두 충족하는 전형적인 유교식 건축물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대지 경사에 맞춰 건물 간 위치를 설정하고, 기단이나 계단을 처리한 것이 돋보인다.
교육공간인 명륜당은 중앙 2칸에 강의실 격인 당(堂)을 두고, 좌우에 방을 만든 팔작지붕 건물이다. 제향공간인 대성전에는 5성위(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와 안향, 이황, 이이 등 우리나라 동국 18현을 비롯해 유학의 선현 25위를 봉안하고 있다.
교동중학교는 1954년 개교 당시 학교건물이 없어 3년 동안 향교의 동무와 서무를 교실로 쓰기도 했다.
홍살문 옆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는데, 대부분 향교의 하마비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적혀있다.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공자를 모신 향교 입구에서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교동향교 하마비 문구는 독특하게도 '수령변장하마비(守令邊將下馬碑)'이다. 수령과 군사 우두머리인 변장은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조선 때 교동도에는 경기·충청·황해도 등 삼도의 수군을 총괄하는 삼도통어사가 설치되는 등 수도 한성을 지키는 해상 군사요충지였기 때문에 섬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 대부분은 군인이었다. 교동향교 하마비가 다른 지역 향교와 다른 이유다.
향교 대성전 서쪽에는 '성전약수'라는 이름의 약수터가 있다. 이 물을 마시고 '문성(文成)'을 이룬 사람이 많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안타깝게도 교동지역 가뭄으로 3년 전부터 약수터에 물이 말라버렸다.
교동도는 우리나라 유교의 초창기부터 유서 깊은 향교를 둔 만큼 예로부터 교육열이 엄청나게 높았다고 한다. 그래서 교동도를 '문향(文鄕)'이라고도 칭했다.
교동도 토박이이자 향토사학자인 한기출 교동역사·문화발전협의회장은 "교동에서는 집집마다 가장이 전부 유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마을 사람들이 유학에 조예가 깊었고, 황해도나 경기도 지역에도 교동 출신 훈장이 많았다고 한다"며 "현재도 교동 출신 중에는 관료나 정치인보다 교육자가 더 많다"고 말했다.
교동향교는 유림회 활동도 인천의 다른 향교보다 활발한 편이다. 교동유림회 회원은 약 150명인데, 교동면 인구가 3천명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적잖은 숫자다.
향교는 음력 8월 상정일(上丁日)에 1년 중 가장 큰 제사의식인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지내고, 매달 초하루(음력 1일)에는 분향례를 지낸다. 유림회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석전대제 등 제사 때마다 제관이 매번 바뀌는 것도 교동향교의 특징이다.
교동향교 책임자인 방형길 전교는 "매달 초하루 분향례에만 20~30명 유림이 오고, 주말이면 향교에 나와 서예 등 방문객 체험프로그램을 돕는 사람도 많다"며 "교동향교는 우리나라 유교의 성지로서 순례자들도 많이 찾고 있어 오늘날까지 활발하게 이용되는 향교 중 하나"라고 했다.
/글 =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