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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연 영화평론가
숲길을 내달려 해변에 섰다. 더 이상 달릴 곳은 없다. 백사장의 모래가 사막처럼 넓게 펼쳐져 있다. 잠시 후면 상해로 향하는 배가 도착할 것이다. 십분만 기다리면 금세 뒤따라오겠다던 사내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막막함과 초조함에 몸서리친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육지와 바다의 경계에 서서 막연히 기다리는 것뿐이다. 대한제국의 황녀로 태어나 한 왕조의 끝에 서있는 그녀의 현실 같다. 과거는 그녀를 놓쳤고 미래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녀가 서있는 곳은, 그러므로 역사의 해변이다.

허진호 감독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비극적 삶을 스크린에 옮겼다. 한 왕조의 마지막을 지켜봐야 했던, 아니 마지막 그 자체였던 여인의 삶은 생각만큼 화려한 극적 장치들로 치장되지 않는다.

신파를 만들기 위한 과잉된 연출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허진호 식의 건조함과 담백함으로 일관하지도 않는다. 과장된 비장미와 담백함 사이의 미묘한 경계면을 타고 넘는다.

그 균형감은 한 인물의 삶을 비극적으로 과장해 전시하거나 민족주의적 감성에 기댄 신파로 기우는 것을 경계한다. 다만 조선이라는 망국의 상징적 인물로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시대의 격랑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인생유전에 초점을 맞춘다.

이에 반해 큰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인물은 오히려 한택수(윤제문)다. 애초에 영화는 고종을 겁박하는 이완용 일파로부터 시작한다. 그 수하로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라와 민중을 버리고 언제나 승자의 편에 서 있었던 한택수라는 인물은 영화를 일본과 한국이 아니라 민족과 반민족이라는 구조로 이동시킨다.

물론 악의 화신인 듯한 인물의 정형성이 갈등구조를 단순화시키고 구성을 헐겁게 만들기는 한다. 그러나 해방 후 영어로 말을 하며 미군을 뒤쫓는 그의 모습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끌어안은 채 가고 잇는 뿌리깊은 '적폐'로서의 친일의 유산을 상기시킨다.

'덕혜옹주'는 앵글의 협소함이나 구도의 단순함, 구성의 단조로움과 같이 다소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허진호만의 보다 깊이 있는 응시가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상업영화가 역사를 다룰 때의 최소한의 기준을 제시해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