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 고택기행 창녕복지관 여선교사 합숙소5
창영감리교회 사회복지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옛 여선교사 기숙사 전경.

미국 감리교회 '선교기지'였던
옛 경인가도 우각로에 들어서
現 창영감리교회 복지관 활용

빨간벽돌 외벽에 북유럽 지붕
서양식 창틀에 전통양식 눈길
당시 조선인 목수가 적용한 듯

영화 유치원 설립 '헤스 부인' 등
1942년까지 수십명 거주 큰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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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동구 창영동과 숭의동을 잇는 고갯길은 과거 '쇠뿔고개'라고 불렸다. 옛날 인천 사람들은 이 고개가 흡사 구부러진 소의 뿔과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때문에 지금도 이 일대는 '우각로(牛角路)'라는 도로명 주소가 사용되고 있다.

쇠뿔고개는 개항 당시 인천에서 서울을 오가는 이들의 주요 통로였다. 인천항에 내린 사람들은 중구 내동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싸리재와 배다리를 지나 쇠뿔고개를 넘어 서울로 향했다.

향토사학자 신태범 박사는 그의 저서인 '인천 한세기'에서 '내동에서 싸리재를 거쳐 쇠뿔고개를 넘는 길이 옛 경인가도(京仁街道)였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서양 문물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 됐다. 초대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호러스 알렌(Horace Allen)의 별장이 고개를 따라 세워졌고, 1897년에는 경인철도 기공식도 열렸다. 1907년에는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인 창영초등학교도 우각로를 따라 연이어 만들어졌다.

이와 함께 미국 감리교회의 인천 선교기지로 활용됐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황해도 연안과 해주, 인천 강화와 영흥·덕적·교동, 경기도 남부지방 등의 선교 여행이 봉쇄돼 제물포와 부평, 부천, 영등포 등 내륙전도에 힘썼기 때문이다.

갬블홈
1905년 만들어진 인천 여선교사 기숙사. 메리 갬블 부인의 기부금으로 건축됐기 때문에 '갬블 홈'으로 불렸다. /영화관광경영고등학교 이성진 교사 제공

1900년대 들어 내리예배당이 늘어나는 교인들로 인해 새로운 예배당을 만들던 시기, 이곳에 예배당이 만들어졌고, 미북감리교회 여선교사 마가렛 벵겔(Magaret J. Bengel)은 이곳에 영화학교를 지었다.

기독교 관련 시설이 많아지면서 이곳에 상주하는 선교사들도 자연스레 늘어나게 되자 교회는 이 선교사들의 거처를 해결해야 했다. 이에 따라 교회는 현재의 인천세무서 자리에 남선교사 기숙사를, 창영감리교회 후문에는 여선교사 기숙사를 만들었다.

16일 우각로에 위치한 여선교사 기숙사를 찾았다. 빨간 벽돌과 파란 양철 지붕, 지붕 위로 솟아오른 굴뚝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정원을 갖춘 이곳은 주변 도심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르네상스식 건물이다.

선교사들의 기숙사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던 교회는 당시 비누를 만들어 큰 돈을 벌었던 미국 'P&G(The Procter & Gamble Company)'사의 매리 갬블(Mary Gamble)부인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녀의 기부로 1905년 기숙사를 건축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은 1906년 한국여선교회가 미북감리교로 보낸 연례 보고서에 "지난해 11월 갬블홈에 입주했다. 신시내티 지부 갬블부인의 후원으로 건축됐다. 갬블홈이 제공하는 안락함에 대해 어떻게 감사를 표현해야 할지 아직도 모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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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여선교사 기숙사 1층 거실. /인천 동구 제공

갬블홈은 단단히 지은 2층 벽돌조 건축물로 3명의 여선교사가 거주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공간이다. 제물포 합숙소는 앞으로도 유용한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했다"고 명시하며 갬블 부인에게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인천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으로 활용되던 이 건물은 지난 2003년부터 창영감리교회가 인수해 사회복지관으로 사용되면서 건물 목적에 맞게 개·보수를 진행했지만, 외부는 건축 당시의 행태를 대부분 유지하고 있다. 미국의 벽돌 건물 양식을 적용해 빨간 벽돌로 외벽을 세웠지만 지붕 형태는 북유럽 형식으로 눈이 많이 와도 쌓이지 않고 그냥 흘러내리도록 하기 위해 뾰족한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지하 기초와 외부 계단이 대리석으로 돼 있어 표면에서 공사에 참여한 조선인 석공들의 다양한 취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내부 창틀의 경우, 사찰 창틀 문양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조선인 목수들이 서양식 창틀을 만들면서도 전통창틀 양식을 적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선교사 기숙사는 건축 당시, 우각리 언덕 위의 빨간 벽돌집으로 멀리 바다가 보일 정도로 동화 속의 집이었다. 이에 시조시인 최성연씨는 1959년 발간한 '개항과 양관역정'이라는 책에서 이곳을 '선교사들의 별천지'라고 표현하며 "'영화여자국민학교 동쪽 민긋한 언덕 위에 낡은 형식의 2층 벽돌집(양관) 한 채가 조초롬히 앉아 있다.

20년 전만 해도 윤이 짜르르 흐르는 잔디밭이 언덕 전체를 덮고 있었고, 멋지게 손질된 수목들 사이에 세 채의 양관(여선교사 기숙사·남선교사 기숙사·아펜젤러 사택)이 삼각형의 정점마다 자리 잡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현재 이 건물은 창영감리교회 기념관을 만들기 위한 공사가 준비 중이기 때문에 이날은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과거 기록 등을 살펴보면 'ㄷ'자 형태로 된 건물 내부는 각 실이 복도로 이어져 있고, 1층에는 대규모 거실이 만들어져 있어 이곳에서 모임 등이 열렸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천 남구 학익동의 극동방송 사옥이 가족 단위 선교사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면 이곳은 독신 선교사들이 머물 수 있는 장소였던 셈이다.

일제가 미국 선교사들을 적국의 국민으로 간주하고,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 1942년까지 이곳에는 수십 명의 미국 여선교사들이 거주했다.

이들 중 3대 영화학교 교장을 지냈던 마가렛 헤스(Margaret Hess)는 이곳에 거주하면서 인천지역에 큰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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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동에서 건너다 본 창영동 일대(1938년). /인천 동구 제공

1913년부터 1940년까지 27년 동안 인천에서만 선교 사업을 벌였던 헤스는 인천 최초로 영화 유치원을 설립하고, 교통 수단이 부실했던 시기에 강화도를 비롯한 서해 도서 지역에까지 작은 배를 타고 구호활동을 벌여 '헤스 부인'이라는 호칭으로 주변 주민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기독병원 간호부장이었던 덴마크 출신의 코스트럽(Alfrida Kostrup)은 부평 계양지방에서 의료와 수해 때 구호활동을 펼쳤으며 유아진료소를 개소하기도 했다.

배다리 등 인천 동구 일대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인천영화관광경영고등학교 이성진 교사는 "'갬블 홈'은 인천 지역 선교와 여성 근대화 운동의 모태가 됐던 곳"이라며 "지금이라도 인천시에서 이를 다시 매입, 보전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