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아지를 사달라는 딸의 부탁은 들어줄 수가 없을 것 같다. 잠시 아내와 통화 중에 고객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거래가 성사된다. 기분 좋은 귀갓길이다. 터널로 진입한다.
터널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므로. 그리고 한국에서 재난은 우리의 상식을 무시하며 다가온다.
김성훈 감독은 '터널'에서 영화 시작한 지 5분 만에 터널을 무너뜨린다. 전작 '끝까지 간다'(2013)에서 보여줬던 1인극에 대한 자신감이었을 수도 있다. 붕괴된 터널 안에 홀로 고립된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터널'은 재난 전 인물들의 전사(前史)를 시시콜콜하게 늘어놓다가 재난이라는 불행을 신파적 코드로 사용하는 재난영화의 패턴을 따라가기보다는 터널 붕괴라는 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갇힌 사람과 구조하려는 사람들, 이용하는 사람들과 외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터널 붕괴라는 사건과의 관계 속에서 보여준다. 그 속에서 과잉된 정서적 자극이 아니라 '사람'과 '생명'이라는 가치와 연대의 소중함을 보여주려 애쓴다.
한국의 재난영화는 점점 현실과 밀착하는 듯하다. 통제 불가능한 자연재해나 사소한 실수로부터 비롯된 개인적 불행을 넘어 사회·구조적 차원의 재난들이 소재가 된다. 내부와 외부의 단절이 뚜렷해지면서 고립된 인물들의 사투와 정부로 표상되는 외부의 무능과 외면이 그려지고, 그 배후에 자본의 탐욕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삼풍백화점 붕괴로부터 세월호까지 누적된 우리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리고 세월호 이후 우리는 할리우드식 영웅적 구원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 됐다.
정부가 구조해주리라는 희망,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신뢰 같은 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단지 생명의 가치와 인간적 연대만이 가느다란 한줄기 희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것이 포스트 세월호 이후 가능한 재난영화의 서사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