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원·새마을금고 등으로 사용 현재는 '살림집'
사무실로 쓰던 2층은 천장도 뜯겨진채 텅 비어
당시 '인천 부자' 최승우·장석우·장광순 등…
어떻게 운영했는지 정확한 자료 찾기 힘들어
가치 제대로 연구 안됐지만 원형 보존돼 다행

용동 '큰우물'에서 인천기독병원 방향으로 난 언덕길을 20여m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에 행인의 발길을 붙잡는 2층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건물에는 '인천흥업○○회사'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데, 역사적 지식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도 관심을 갖게 되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곳에 잠시 서 있으면 발길을 멈추고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에 담아 가는 행인의 모습을 쉽게 만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천지역 향토사나 근대 건축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개인 블로그라면 어디서나 이 건물의 바깥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단골 손님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에 비해 건물의 내력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이 건물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지난 18일 이곳(중구 용동 152-6)을 찾아갔다.

지금은 살림집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엔 행정사 유한규(79)씨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인터뷰를 거절하던 유씨를 어렵게 설득한 끝에 그로부터 건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유씨가 이 건물을 매입한 것은 벌써 20여년 전인 1979년의 일로, 그가 520만원을 들여 이 건물의 주인이 된 후로 현재까지 건물 주인이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다.
개인이 활용하기에 여러모로 불편해 보이는 이 건물을 무슨 이유에서 매입했는지 물었다. 그는 "인천에 옛 건물들이 즐비했지만 하나 둘 사라지고 마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이 건물을 구입하게 됐다"고 답했다. 또 인천의 부자였던 장광순씨의 부탁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유씨는 옛 체신부 전신전화국 도수계 촬영기사로 20년가까이 근무했는데, 벌이가 괜찮았고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도수계 촬영기사는 전화국이 전화 가입자의 전화이용요금을 매기는 근거가 되는 전자식 기계인 '도수계(콜미터)'를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해 기록을 남기는 게 주요 업무였는데, 그가 담당한 곳이 많을 때는 10여곳이 넘었다고 한다.
그의 안내를 받아 건물 1~2층을 둘러볼 수 있었다. 지금 1층은 유씨 부부가 생활하는 공간으로 쓰고 있다. 살림집으로 이용하기 전에는 병원과 새마을금고 등이 이 공간을 사용했다고 했다. 건물 2층은 사무실 등이 입주해 있었는데, 큰 회의실과 작은 사무실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텅 비어있고 바닥과 천장이 군데군데 뜯겨 있었다.
유씨는 건물 2층의 촬영만을 허락했다. 그는 "건물을 매입한 이후 손을 댄 곳이 거의 없다"며 "여건이 허락지 않아 관리를 잘 하지 못했다. 이 건물을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분들이 나서줬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했다.
지금 이 건물에는 '인천흥업○○회사'라는 글자가 남아있지만 떨어진 두 글자는 '주식'인데, 10여년전 떨어진 것을 유씨가 보관하다가 분실했다고 한다.
옛 토지대장을 확인해 보면 이 건물(부지)의 최초 주인은 '인천흥업주식회사'로 나오며 1938년부터 기록이 시작된다. 두 번째 주인으로 '재단법인 경기도 향교재단'이 1974년부터 소유했고, 이후 유씨가 1979년 경기도 향교재단으로부터 이를 매입하며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인천흥업주식회사는 서민을 상대로 대출을 하며 돈을 굴리던 금융회사다. 1937년판 조선은행주식회사조합요록을 보면 인천흥업주식회사와 관련된 기록이 나온다.
기록을 보면 인천흥업주식회사는 금융신탁 업종의 회사로 설립일이 1935년 11월 16일, 대표자는 최승우, 회사 목적은 '담보대부, 신용대부, 기타 금융업 일체'로 나와 있다.
발행 주식수는 3천주로 주주의 인원은 49명, 주요 주주로는 최승우(520), 장석우(357), 장광순(332), 인천물산객주조합(330), 정희조(296) 등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주주들의 이름과 인천흥업주식회사와 관련된 기록은 고일 선생이 쓴 '인천석금'의 '옛 인천의 부자는 누구 누구?' 편에서 언급된다.
"…우리 부자를 찾아보자. 재산 50만원을 최고로하고, 최저 10만원 정도의 부자를 차례로 든다면, 심능덕 씨를 필두로 구창조, 장석우, 최승우, 정치국, 정영화, 정순택, 유군성, 주병기, 주명서, 장세익 씨 등이다. (중략) 자본금 2만원과 은행 대부금 2만원으로 10여명의 부호들이 1백원에 대한 하루의 이자를 6전으로 융자를 했던 간이 고급 금융 기관인 '인천신용조합'이 닭전거리(지금의 신포동)에서 간판을 걸고 군림했었으니 일제하의 우리 부호들이 얼마나 미약했었던가를 엿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주인도 바뀐 채 '인천흥업주식회사'라는 음각 간판만이 용동 '크라운예식장' 옆 2층 건물에 달려 있을 뿐, 쓸쓸하게 역사의 변천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다…"
인천흥업주식회사의 주주인 장석우, 최승우, 장광순 등의 이름이 고일 선생의 저서에 '인천 부자'로 언급되고 있고 인천신용조합이 인천흥업주식회사로 이름과 주인이 바뀌었다고 나와 있다.
주주들을 설명하자면 최승우는 인천동산학교의 설립자로 양조장을 운영해 부를 쌓았고, 장석우는 인천박문학교 전신인 소화학교 설립자로 포목상을 운영해 지역 부자가 됐다고 한다. 장광순씨는 장석우씨의 장남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인천의 부자로 알려진 이들이 어떤 이유에서 인천흥업주식회사를 세우고 어떤 방식으로 운영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정확한 자료를 찾기는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건물이 아직도 모습을 유지하며 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시사편찬전문위원은 "이 건물에 대해 정확히 연구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무척 다행으로 여겨진다"며 "이 건물이 어떤 역사적 가치가 있는지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흘러 또 어떤 소중한 가치를 지니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잘 관리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글 =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