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산성과 신라토기
◀용인 할미산성의 성벽(왼쪽)과 용인 보정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신라토기.

고구려와 달리 점령지 직접 지배
주요 거점 산성·고분군 발굴 의미
집수시설 등 장기항전 준비 확인
매장문화재 발굴 인식 개선 필요


신라는 551년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상류를 차지하고, 553년에는 백제가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한강 하류까지도 차지하는데, 고구려와는 달리 영토와 백성에 대한 직접지배 방식을 취했다.

즉 그들은 새로운 정복지역의 행정적·군사적 요충지에 산성을 쌓아 점령지 지배를 굳건하게 했으며, 신라의 정복활동으로 복속한 가야인과 기존의 신라인들을 한강 유역으로 이주시켜 살게 했다. 아울러 북한산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워 신라가 한강유역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사실을 천하에 공포했다.

이런 신라의 정복지에 대한 직접지배 방식은 고고학적 증거로 잘 남아있는데, 경기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신라의 산성과 고분군이 그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하남 이성산성, 이천 설봉산성, 양주 대모산성, 포천 반월산성, 고양 고봉산성, 파주 봉서산성, 교하 오두산성, 여주 파사성, 안산 성태산성, 오산 독산성 등을 포함한 18개의 신라산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신라고분군으로는 신라산성과 인접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현재까지 파주 성동리 고분군, 용인 보정동 고분군, 화성 백곡리 고분군, 여주 매룡리 고분군 등이 발굴되어 알려져 있다.

신라 산성과 고분군은 경기도의 주요 행정거점과 군사요충지에 축성되었는데, 이들이 자리했던 지점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경기도 행정중심지의 위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경기도 통치체제의 기본적인 틀이 마련된 시점이 신라후기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경기지역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가장 잘 반영해주고 있는 유적이 용인시 구성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용인 할미산성(경기도 기념물 제215호)과 용인 보정동 고분군(사적 제500호)이다.

할미산성은 전체 둘레가 651m 정도에 불과한 작은 산성이지만 성 내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물을 모아두기 위한 대형의 집수(集水)시설, 제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팔각형 건물지의 존재를 보여주는 초석 등이 발굴됐으며, 전형적인 신라양식의 굽다리접시와 단선(單線) 문양의 기와가 출토됐다.

용인 보정동 고분군에서는 80여 기의 고분이 발굴됐는데, 시신을 묻는 매장주체부는 주로 횡구식석곽으로 추가장(追加葬)을 할 수 있는 구조였다.

유물은 굽이 달린 장경호를 포함한 전형적인 신라후기 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됐는데 경주지역에서 생산한 품질이 좋은 상품(上品)과 그것보다는 제작기술이 다소 떨어지는 현지생산의 토기가 섞여 있었다. 한편 묘지를 선택할 때 기존의 백제 고분군이 있던 곳을 피했던 점도 확인됐다.

이상의 발굴성과를 통하여 신라는 백제지역을 지배하면서 그들의 선영(先塋)을 보호함으로써 유화정책을 펼쳤던 점, 그러면서도 문화적으로 신라의 장례습속을 강요하여 현지민의 신라화(新羅化)를 모색했던 점, 사민정책을 실시하여 새로운 거점에 대한 지배를 공고하게 하고자 했던 점 등을 알 수 있다.

또 읍치의 배후에 피난성을 만들어 환란(患亂)에 대비했으며, 그곳에 집수시설을 만들어 장기항전을 준비했던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국가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공간을 만들어 치성을 드렸던 사실도 추측할 수 있다. 한편, 경주 주변의 무덤양식, 매장의식, 토기제작기법 등이 그대로 확인돼 신라문화의 이식(移植)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던 점도 발견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고고학적 발견과 그에 대한 해석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등 문헌자료에서는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는 신라의 모습이다. 한마디로 고고학이 만들어낸 학문적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문화재보호법이 일정 규모 이상의 공사행위에 대한 문화재조사를 의무화하고, 학술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를 지정·보호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재의 지정을 사유권의 침해만으로 보는 시각에 여론이 전도되지 않았으면 한다. 또 매장문화재의 발굴이 개발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만으로 취급받지 않길 바란다.

도시화로 인한 경관의 파괴를 막아주는 강력한 수단이 문화재 보호일 수 있고, 가뜩이나 부족한 지역의 역사를 풍부하게 해 주는 것도 고고학적 연구 결과에서 비롯되며, 건조한 역사에 볼거리를 제공하여 '한국사의 시각화'에 절대적인 공헌을 할 수 있는 것이 유적과 유물이기 때문이다.

20160911010007059000334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