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목책성인 안성 도기도 유적
고구려 목책성인 안성 도기동 유적(왼쪽)과 고구려 산성인 파주 덕진산성. /경기문화재단 제공

관방유적 위주 가장 많이 분포돼
한반도서 가장 중요한 지역 증명
파주~안성, 출발점과 종착점 의미
두 곳 모두 '국가사적 지정' 신청

고구려는 475년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지역을 차지한다. 현재까지 세종 남성골 산성과 대전 월평동 산성에서 발굴된 고구려 군사시설은 고구려가 금강 유역까지 진출하였음을 입증해 준다.

또 충주의 중원고구려비는 남한강 유역도 고구려가 지배하였던 사실을 단적으로 입증해준다. 그리고 고구려는 551년 신라와 백제의 동맹군에 의하여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668년 멸망 때까지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신라와 대치했던 것으로 역사는 전하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는 경기도 지역을 거의 200년 동안 지배했고, 남한지역에서 고구려유적이 가장 집중해 있는 곳도 경기도이다. 경기도 지역에 남아있는 고구려 유적은 국경 방비를 위해 설치한 군사시설인 관방유적(關防遺蹟)이 절대적이다.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와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 임진강 유역의 고구려 성곽이 대표적이다. 현재 이들 모두는 발굴이 이루어져 학술적 가치가 인정된 상태이며, 국가 사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안성 도기동 유적은 2015년 9월에 발굴로 확인된 목책성(木柵城)으로, 목책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나무 울타리인 목책을 설치했던 흔적인 구덩이가 일정한 열을 맞추어 발굴되었다. 구조는 흙을 쌓아 올린 둔덕인 토루(土壘)를 중심으로 안쪽에 1열, 바깥쪽에 2열로 목책을 설치했는데, 안팎 목책의 간격은 4.5∼5m로 드러났다.

발굴조사단은 토루의 주변에서 짧은목 항아리, 사발, 뚜껑과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등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고, 세종시 부강면에 있는 남성골 고구려 산성과 축조 방법이 흡사한 점을 들어, 이 도기동 유적을 고구려 목책성으로 최종 판단했다.

그리고 학계는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금강 일대까지 진출한 증거로 보았다. 더 나아가 일부 학자는 장수왕이 한성을 함락시킨 뒤 군사를 주둔하지 않고 돌아가 백제가 계속 한강 일대를 점유했다는 학설이나, 백제가 웅진 천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력을 회복하여 고구려를 한강 이남에서 축출했다는 학설 등을 반박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했다.

덕진산성(경기도기념물 제218호)은 연천의 호로고루성, 당포성, 은대리성과 함께 임진강 북안에 축성되었던 고구려 성곽으로, 다른 고구려 성곽과는 달리 통일신라시대에 전면적인 개축이 이루어지고 조선 광해군 때에 외성(外城)이 추가된 이중 구조를 지닌 산성이다.

1992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군사보호구역내 지표조사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이래 21세기가 되어서야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들 조사를 통하여 고구려가 처음 축조한 다음 1차 수축을 하였고, 신라가 적어도 세 차례 이상 다시 쌓았던 사실을 확인하였다. 또 고구려가 축성한 사실을 입증하는 전형적인 고구려 기와와 토기가 다량 발굴되었다.

안성 도기동 유적은 충청도와 가까운 안성천 유역에 자리하고 있다. 덕진산성은 고구려 유적 중에서도 임진강 최하류에 위치하며 민통선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유적 사이에는 고구려 유적이 선상으로 분포한다. 이런 고구려 유적의 분포양상은 고구려군의 남진로일 뿐만 아니라, 신라의 북진로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에도 대군의 이동로였으며, 지금도 간선도로의 구실을 하고 있다.

파주 덕진산성과 안성 도기동 유적은 현재 국가지정문화재로의 승격, 즉 국가 사적 지정을 신청해 둔 상태이다. 두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될 경우, 우리는 경기도를 종단하고 군사분계선을 따라 늘어서 있는 고구려 유적의 출발점과 종착점에 사적을 두게 된다.

이런 사실을 감안해 경기옛길 사업과 연계하여 '고구려 대장정'사업을 제안해 본다. 학계의 전문가들이 복원해 둔 고구려 남정로(南征路)를 따라 고구려를 직접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청소년과 도민에게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경기도는 옛 삼국시대 고구려 유적의 거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고, 삼국간의 국운을 건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곳을 차지한 나라는 국가 발전의 최성기를 구가했다.

이러한 사실은 고대 국가시대 이후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지역이 바로 경기도였음을 상기시켜, '국가 근본의 땅(國家根本之地)'이라 불렸던 경기도의 정체성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주고 있다.
2016091801001012500048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