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암리식 토기(좌)와 여(呂)자형 주거지2
청동기시대의 흔암리식 토기(왼쪽)와 한성백제기의 여(呂)자형 주거지. /경기문화재단 문화유산본부 제공

두만강·연해주 토기·주거 특징
경흥대로·발해만 등 통해 유입
경기도에서 다시 남부로 '전파'
선사시대부터 '허브' 역할 수행


고고학에서 유적이나 유물의 이름을 지을 때 처음 발견된 곳이나 가장 대표적인 장소를 본 따서 명명하기도 한다. 청동기시대의 가락동식 주거지, 역삼동식 토기 등이 그것이다. 오늘 소개할 흔암리식 토기도 여주 흔암리 선사유적(경기도기념물 제155호)에서 확인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흔암리식 토기는 겹아가리에 구멍무늬와 빗금 장식이 있는 청동기시대 전기(기원전 15세기~기원전 6세기)의 토기 양식을 말하며, 분포는 금강 중상류를 제외한 남한 전역은 물론 제주도까지 이른다.

여기서 토기의 아가리 부분 즉 입술 주변을 돌아가며 구멍을 뚫은 스타일은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지방의 토기 양식이므로, 흔암리식 토기의 속성 중의 일부는 동북지방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한강유역 신석기 문화에 동북지방의 영향이 크게 확인되지 않는 점과 흔암리식 토기의 시작이 청동기시대 전기인 사실을 연결할 때, 양 지역 사이의 문화 교류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성백제기 경기도를 대표하는 집자리로 여(呂)자형·철(凸)자형 주거지가 있다. 구조적으로 네모난 주거지의 입구를 돌출시켜 출입시설이나 부속실을 마련한 것이 특징적이며, 주거 내부에는 난방과 조리를 위한 터널형 노지(爐址)를 갖추고 있다.

이들 주거지도 중국 길림성 동부지방과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그 내부에서 출토되는 토기들도 연해주와 중국 동북지역의 토기 스타일과 연결되고 있다.

이렇듯 경기 문화의 형성에는 두만강 유역과 연해주의 문화적 요소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런 문화의 전파는 조선시대 실학자 신경준이 구획한 6대로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하는 경흥대로(慶興大路, 한양에서 함경도 경흥까지의 대로)와 엇비슷했을 듯하다.

그 이유는 근대 교통이 발달하기 이전에 한강유역에서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북상하여 철령을 넘어서 동해안을 끼고 두만강 유역으로 가는 길이 인마(人馬)와 물자(物資)의 이동에 가장 적합한 교통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구려의 복속 세력인 말갈도 이 길을 통하여 백제를 노략질하려 왔고, 진흥왕도 한강 유역을 점령한 다음, 이 교통로를 따라 함경도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경기도에 살았던 선사와 고대 사람들은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 문화(혹은 초원문화)의 영향과 함께 서북지방을 경유한 요녕 지방의 문화도 받아들였으며 발해만을 통하여 중국 중원의 문화도 수용했다. 그리고 이들 문화를 융합시켜 '한강 스타일'을 만들어 한반도 남부로 파급시켰다.

이처럼 경기 지역은 다양한 문화들이 모여드는 결절지(結節地, 문물이 집중되는 곳)였고 새로운 문화의 생산지(生産地)였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문화를 전파하는 문화의 공급지(供給地)였다. 인체에 비유하면 심장이었고 차바퀴로 말하자면 허브였다. 지방시대가 열리면서 자기 지역의 정체성을 찾고자 지역학이 발달하고 있다.

경기도 역시 경기도의 고유성 즉 경기성(京畿性)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경기성에 선사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문화의 허브'로서의 경기도의 특성이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중국의 대륙문화뿐만 아니라 북방의 초원문화가 유입되어 경기지역의 문화원형이 되었던 사실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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