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수 감독의 '아수라'는 기시감의 아수라장이다. 이중첩자가 된 경찰의 처절한 몸부림('신세계') 같기도 하고 검찰 조직과의 치열한 격돌('부당거래') 같기도 하다. '똥개'나 '범죄와의 전쟁'이 떠오르기도 한다. 배우와 캐릭터의 배치가 그렇다.
유약한 딸바보 검찰수사관(정만식)은 마초가 되어 돌아왔고 경찰 앞에서 바지를 내리던 광수대 팀장과 껄렁껄렁한 조폭 보스(황정민)는 깡패 같은 시장이 됐다. 정의와 '줄'을 양손에 쥐고 있던 검사(곽도원)는 여전히 정의로워 보이고 경찰 아버지에 반항하던 꼴통(정우성)은 자신이 경찰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브라더십은 기대할 수 없고, 정의를 외치던 검사는 폭력 앞에서 속절없이 나약하다.
'아수라'는 오히려 '킬리만자로'의 비정한 세계인식을 닮았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어디에도 승자는 없고 단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승패가 아니라 죽음이므로. 승패를 가르는 일조차 죽음 앞에서는 사치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이미 장례식장이다.
'아수라'의 난장판 한가운데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배우이고 캐릭터일 뿐이다. 그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재개발'이라는 욕망의 덩어리이다.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강남1970')도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도 배우에 불과하다.
안산과 성남을 조합한 듯한 배경 안남시는 '천당 밑에 분당'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재개발 지역에 들어설 마천루는 메시아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메시아를 예비하는 이 시대의 선지자들이다. 물 대신 총과 칼로 세례를 주는 세례 요한이다. '아수라'가 보여주는 캐릭터의 변용은 천국을 준비하지만 장례식장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dupss@nate.com)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