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의 경기도 일대 진출과 함께 축성한 '둘레 1.9㎞' 성곽
13회 발굴조사… 목간발견으로 지방관직제·문서행정 확인
나무·천 등 유물 썩지않고 출토… 문화재적 가치 조명 필요
신라는 6세기 중반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정복지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군사적·행정적 거점에 견고한 산성을 새롭게 쌓았다.
오늘 소개할 이성산성도 신라의 경기도 일대 진출과 함께 축성된 산성 18곳 중 하나로, 신주의 행정소재지 즉 치소(治所)에 쌓은 둘레 1.9km의 성곽이다. 지금에 비유하자면, 삼국후기부터 통일신라말기까지 경기도청이 자리했던 곳이 하남의 이성산성인 셈이다.
이성산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지금까지 13차례 이루어졌다. 발굴 결과, 6세기 중반에 처음으로 쌓았고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 사이에 걸쳐 대대적인 수축(修築)이 이루어졌던 사실, 성문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懸門式)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성 내부의 조사에서 정면 17칸의 대형건물지, 8각·9각·12각 등 특수 건물지를 비롯한 20여 곳의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장기전을 대비하기 위한 대형 저수지가 2곳 발굴되어 군현(郡縣) 단위에 쌓은 산성보다는 위상이 높은 성곽임이 드러났다.
유물은 토기, 철기, 기와, 목기 등 3천500여 점 이상이 출토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저수지에서 다른 목간 37점과 함께 출토된 '무진년' 목간('戊辰年' 木簡)이다.
이 목간에는 무진년(608년) 정월 12일 새벽에 남한성(南漢城) 도사(道使)가 수성(須城)의 도사와 촌주(村主)에게 내린 행정 명령이 묵서(墨書)로 적혀 있었다. 이 목간의 발견으로 이성산성이 당시에 남한성으로 불렸던 사실을 알 수 있었으며, 신라의 지방관직 제도뿐만 아니라 문서행정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성 내부에서 벼루 30여 점이 출토되었다. 이성산성 출토품을 포함하여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벼루가 90여 점에 불과하고, 그중에서 경주에서 출토된 것이 54점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성산성에서 문서행위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 이들 벼루의 다량 출토는 이성산성이 신주의 치소라는 추정을 보다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
한편 이성산성에서는 8각형과 9각형의 다각형 건물지도 확인되었다. 여기서 8각 건물지는 중심부에 4개의 둥근돌이 세워져있어 사직단(社稷壇)으로, 9각 건물지는 9라는 숫자가 하늘을 상징하는 숫자임을 들어 천단(天壇)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건물지는 이성산성 내에서 국가적 제사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와 함께 토제·철제로 만든 말 모형 17개가 매납된 의례유구도 확인돼 이성산성 내에서 벽사적 제의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형의 저수지 2곳의 바닥면에는 지속적으로 수분이 공급되었고 그 결과로 유기물에 해당되는 나무빗, 나무 얼레빗, 나무 팽이, 박바가지, 칠기, 나무 인형, 나무 망치, 짚신, 버들고리, 천 조각 등의 유물들은 썩지 않고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은 다른 성곽에서는 거의 출토되지 않는 유기질의 일상용품이기에 통일신라시대의 생활문화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렇듯 이성산성은 신라후기부터 통일신라말기까지 경기지역의 군사, 행정, 신앙, 건축, 생활문화에 관한 다양하고도 귀중한 자료를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인이 이성산성에 대해 접할 수 있는 정보는 정비·복원한 산성과 산성 내의 문화재 안내판, 그리고 인터넷 포털의 간단한 유적 설명에 불과하다. 이성산성이 지닌 문화콘텐츠에 비하여 소략하기 그지없고, 이런 까닭에 도민들은 이성산성의 문화재적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유적지도 역사교육의 장으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하여 '사이버 이성산성'의 제작을 제안해 본다. 이를 위해서는 이성산성에 관한 자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다양하고 풍부한 정보가 제공될 수 있는 블로그 정도면 충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