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일보, 초기 '左진영' 다수 글
경영진과 편집국간 내부 진통도
그러나 현실은 이런 기대와 크게 벗어났다. 38도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각각 진주했다. 이들은 정부수립까지 일정기간 안정화가 필요하다며 신탁통치론을 폈다. 독립은 됐지만, 우리의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이 기간 국내 좌익과 우익 진영의 대립은 격화했다. 각 진영의 주요 인사가 테러를 당하는 등 정치적 혼란도 컸다. 당시 발행된 신문들은 좌익과 우익 등 특정 진영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인일보의 전신 대중일보도 그 격랑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대중일보는 1946년 1월 18일자 2면에 '반탁 인천시민대회 개최'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다. 한국민주당 인천지부 주도로 신탁통치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탁운동을 국민운동으로 추진하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에선 당시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익과 우익 진영의 갈등을 엿볼 수 있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우리나라를 5년간 신탁통치하는 안건이 통과됐다. 이 결정은 좌익과 우익진영의 대립에 불을 댕겼다.
좌익과 우익진영은 3상 회의 직후 며칠간 신탁통치를 모두 반대했지만, '신탁통치를 찬성한다'는 조선공산당의 발표(1946년 1월 2일) 뒤 좌익 진영은 찬탁(贊託)으로 돌변했다. 당시 신문들도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의 입장을 대변하기 시작했다.
대중일보는 창간호를 비롯한 초기 신문엔 임화 등 좌익진영 인사의 글과 단체 소식을 다수 실었다. 창간 당시 편집국장은 좌익 인사로 분류되는 엄흥섭이었다.
그런데 대중일보는 조선공산당 발표 이후에도 반탁(反託) 논조를 취했다. '봉기하라 3천만 동포', '신탁관리라니 될 말인가'를 실었던 대중일보는 이후에도 '탁치 절대 반대', '생도의 신탁통치 반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시의원 총사직, 사표 반려' 등의 기사를 이어갔다.
창간 100일 만에 편집국장 엄흥섭, 정경부장 손계언, 사회부장 이원창, 문화부장 김도인 등 편집국의 주축을 이뤘던 세력이 갑자기 회사를 떠났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대중일보 경영진과 편집국 간 이념적 갈등이 이들의 퇴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된다.
대중일보를 그만둔 엄흥섭 등 인사는 좌익진영 신문인 인천신문 창간(1946년 3월 1일)에 참여했다. 인천신문은 좌익 성향을 분명히 했다. 미군정으로부터 허위보도를 이유로 수사를 받기도 했고, 우익진영으로부터 사무실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해방공간에서 대중일보는 누가 신문을 만드느냐에 따라 좌·우익을 오갔다.
/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