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문 시험서 70명 중 3명만 한글
어린여자아이에 부친의 성 묻자
"아버지는 긴상, 나는 가네야마"
인천시는 일제가 만든 동 이름 70여 개와 학교명칭 등을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당시 발행된 대중일보를 보면, 35년 가까이 쓰던 일본말을 단번에 없애는 일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중일보가 1946년 1월 1일부터 신년기획으로 세 번에 걸쳐 보도한 <말살하자 왜말, 바로잡자 우리말> 좌담회 기사를 보면, 뿌리 깊게 박힌 우리 사회의 당시 일본말 사용실태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좌담회에 참석한 한철 인천우편국 전화과장은 교환수 채용시험과 관련한 일화를 얘기했다. 그는 "작문시험을 조선어와 일어 중에 어느 것이든 편한 대로 골라서 쓰라고 했더니 70명 중에 조선어로 쓴 애가 3명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어 "실제로 사용하기가 편리하니 자연히 왜말을 쓰는가 보다"라고 덧붙였다. 해방을 맞고 해를 넘겼건만 우리에게 일본말이 더 편하게 쓰였다는 점은 여전히 맘을 무겁게 한다.
이경웅 인천세무서장은 좌담회에서 가택수사를 벌이던 중 겪었던 얘기를 들려줬다. "'김유'라는 문패가 붙은 집을 갔는데, 소학교 2~3학년 정도의 여자애만 있어서 도청 산림과에 다닌다는 아버지 성을 물으니 '긴(金)상'이라고 답하고, 자기 성은 '가네야마(金山)'라고 대답을 하더라"고 했다.
아버지의 성은 '김'씨라면서도, 자기 성은 '김'씨의 일제 창씨명인 '가네야마'라고 한 것이다. 아버지는 해방과 함께 창씨개명했던 성을 버리고 본래 성을 되찾아 문패를 달았는데, 그 자식에게는 일본말이 이미 완전한 모국어가 돼 있었던 탓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임홍재 인천시장은 "아직도 왜말을 쓰는 사람이 많은데, 각자가 말을 할 때 이게 왜말인가 판단 못해 말이 나오는 것이 있고, 공문을 발송할 때도 그렇다"며 "아직 의식탈취를 못한 데도 있다"고 했다.
좌담회에서는 "잡지나 소설 같은 왜말로 된 책을 늘 보기 때문에 우리말 사용이 잘 고쳐지지 않는다"는 원인분석과 "먼저 우리말로 된 책을 많이 출판해 보급해야 한다"는 대안이 제시되기도 했다.
'광야'의 시인 이육사의 친동생이기도 한 이원창 대중일보 사회부장은 "조선정신을 도로 찾는 의미에서 일본정신 파쇄 주간같은 것을 실시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한철 과장은 "왜말을 쓰는 게 국민적 치욕이라는 관념을 넣어주는 게 당면 문제"라고 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상황에서도 전화교환수에게 일본어로 교환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금 고지서엔 여전히 창씨명이 실렸고, 거리의 일본어 간판도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