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시대부터 고고학 자료 풍성
온돌·식기, 동북·중국 문물 수용
한강 따라 분포 '지역 특성' 대변
서울 근교 라이브 카페촌과 조정경기장으로 유명한 하남 미사동에는 하남 미사리 유적(국가사적 제269호)이 자리하고 있다. 유적은 한강 중상류의 남북 4㎞, 동서 1.5㎞의 타원형 섬인 미사리(지금은 미사동)의 강변 쪽을 따라 발달한 자연 제방을 중심으로 분포해 있다.
유적에 대한 조사는 서쪽 지류에 올림픽 조정경기장을 만들면서 동쪽 본류의 수량이 늘어나자 섬의 동쪽 일부를 잘라 강폭을 넓히는 한강 유역 종합개발사업이 계획되면서 1988~1993년에 걸쳐 실시됐다.
조사 결과, 신석기시대부터 한성백제시기까지의 마을유적이 차례로 드러났다. 그리고 그 마을 내부에서는 움집 형태의 집터, 창고 기능으로 추정되는 고상식(高床式) 건물지, 저장 등의 목적으로 사용한 구덩이, 불을 피워 조리를 했던 화덕자리 등이 발굴되었고, 그 숫자는 466기에 달했다.
이와 함께 백제시대 문화층에서는 상하로 중복된 밭 유구가 상층 4천700여 평, 하층 1천700여 평 규모로 발굴되었다.
이렇듯 미사리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한성백제시기까지의 유구가 시간 순으로 광범위한 범위에서 확인되어 한강을 중심으로 하는 기전(畿甸) 지역의 마을이 발전해 온 양상을 살필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를 제공하였고, 그런 까닭에 중부지방을 대표하는 마을유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미사리유적에서 가장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구는 여자형(呂字形) 주거지이다. 이 주거지는 장방형 집자리의 전면(全面)에 지금의 현관에 비유될 수 있는 소규모의 출입시설이 있는 것으로, 대체적으로 평면형태가 한자 '여(呂)'자와 유사하다.(사진 왼쪽) 구조상 지하를 파서 주거공간을 만들고 지표면에 출입 공간을 조성하였다.
대형의 경우 규모는 약 90㎡(약 27평) 정도로 청동기시대의 대형 주거지 60㎡와 비교할 때 규모에서의 현저한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내부에는 벽체를 따라 'ㄱ'자 모양의 온돌을 꺾어서 설치했고, 집자리의 중앙에는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노지(爐址)를 마련했다. 유물로는 돗자리 문양을 전면에 시문한 둥근 바닥의 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됐다.
이런 여자형주거지에 설치된 온돌은 외줄이지만, 우리나라 주거문화를 대표하는 온돌의 시원형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깊다. 또한 그런 온돌의 원조 지역이 연해주라는 사실은, 우리의 온돌문화와 주거문화가 동북지방에 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 반면에 토기는 낙랑토기를 본떠서 만들었는데, 이는 식기(食器)는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주거지의 규모는 우리나라 전용 면적으로 볼 때 지금의 소위 33평 아파트보다 큰 규모이다. 이런 사실은 기원후 2세기 무렵에 이미 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졌음을 추정케 해 준다.
마지막으로 이런 여자형주거지는 남한강과 북한강 그리고 한강 본류에서만 확인되고 있어, 한국고대 경기지역의 고유성을 대변해 주는 특징적인 가옥 구조이기도 하다.
미사리 유적은 우리나라 취락발달사를 보여주는 유적이자 선사·고대 경기인의 주거와 생활 문화를 간직한 유적이다. 그런데 지금 미사리 유적이 소재한 하남 미사동으로 가 보라. 문화재 안내판을 제외하고는 유적의 존재를 알리는 어떤 문화시설도 없다. 미사리 유적은 대단위 마을 유적이다.
그것도 경작지를 갖춘 마을 유적이다. 한강을 끼고 있어 경관이 빼어나고 중부고속도로와 올림픽대로와 연결되어 있어 접근성도 탁월하다.
이런 유적에 백제인의 삶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백제마을을 재현하고, 2천여 년 전의 농경을 복원하고, 그곳에서 생산된 농산물로 새로운 먹거리를 개발하여 국민들이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면 한다.
사적이기에 국가적 예산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수도권이라는 두터운 수요층이 있기에 최적의 관광 상품이 될 수 있으며, 유적이 지닌 문화콘텐츠가 풍부하기에 얼마든지 문화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다.
유적의 규모와 내용면에서 하위에 있는 서울의 암사동 유적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가 하며 적극적으로 정비·활용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