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비호받던 세화회
조선어강습회등 잔류 몸부림
대중일보 '일본행 촉구' 보도
일본인 송환이 지연된 건, 일제를 대신해 통치하기 시작한 미군정과 조선총독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일본인 송환 역할을 맡던 '세화회(世話會)' 사이의 역학관계 때문이다.
미군정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월 하순 들어서야 '일본인 총철퇴령'을 내렸다.
대중일보는 1946년 2월 24일자 기사에서 "근 70년간 인천항의 주권을 잡아오든 일본놈들은 3월 3일 이후에는 찾아보려야 그 그림자도 찾을 수 없게 되었으니 국운의 성쇠가 그 국민들에게 미치는 바 영향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우리들은 명심하고 일치단결로서 국운신장에 건투할 것이라 한다"고 보도했다.
일제가 항복은 했지만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으며 설립된 세화회는 일본인 대상 조선어강습회를 열기도 했다. 세화회 회보 창간호에서 "우리들의 친구 조선의 기쁨을 우리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동아시아의 발전을 위해 우리도 협력하자"고 할 정도였다.
일본인들은 당장 자녀 교육을 문제 삼았다. 미군정이 1945년 9월 말부터 조선어 수업을 강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일보는 '일인들 자제 취학 애원'(1945년 10월 13일자) 기사에서 해방으로 입장이 뒤바뀐 일본인의 처지를 꼬집는다.
2명의 일본인이 인천부청을 찾아 미군정관에게 자식의 욱(旭) 국민학교(현 신흥 초등학교) 취학을 요구했는데, "여기는 조선 나라이니 조선말만 가르치고 다른 나라말은 가르치지 않으니까 그래도 좋다면 지금이라도 취학을 시켜도 좋다"는 '통쾌한 답변'을 했고, "찾아왔던 일본인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대로 돌아섰다"는 내용이었다.
미군정이 정한 송환 시점이 2개월이나 지났지만, 다양한 이유로 인천을 떠나지 못하던 일본인은 50여 명이나 됐다. 조선 청년을 사랑한 일본인 여성을 비롯해 53세 된 조선 마누라와 남매를 둔 56세의 일본인 영감, 일본인에게 자진 입적했다가 해방 후 낭패를 본 기회주의자까지 처지가 다양하기도 했다.
대중일보는 이 문제를 다룬 '백의(白衣)의 미왜희(美倭姬)는 애(愛)의 포로'(1946년 5월 4일자) 기사에서 "조선인 호적에 오르지 못한 혼혈아, 일본인 가정에 입양돼 호화롭게 성장한 조선인 등 다양한 이유로 떠나지 못하고 있지만, 부족한 우리들의 식량을 소비하는 자들은 하루바삐 철귀시키라는 여론이 넓다"며 이들의 일본행을 촉구했다.
/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