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부족·진해해양대 병합 '진통'
해방 후 혼란했던 시기, 해양인재를 키워낼 적지로 국가가 꼽은 곳이 바로 '인천'이었다. 대중일보는 인천해양대 설립 당시 '시민이 대망하는', '전 국민이 갈망하는' 등의 표현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인천해양대 설립이 발표된 건 해방 1주년 무렵 임홍재 인천시장의 기자회견장이었다. 임홍재 시장은 대중일보 1946년 8월 15일자 기사에서 "미군정 당국의 정식 인가가 아직 없어 확실하진 않지만, 곧 해양대학 신입생을 모집하게 될 것이고 교사는 조선기계의 공장 일부를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조선기계'는 만석동 해안에 있던 조선기계제작소를 말한다.
인천해양대 설립은 다음 달(1946년 9월 4일자) 공식 발표됐다. 항해과와 기관과, 조선과 등 3개 과에 예과는 이론수업을, 본과는 실습수업을 하는 것으로 구성됐다. 대학 설립비용으로는 4천만원이 필요했다고 한다. 이중 1천만원을 정부가 지원하고, 나머지 3천만원은 기성회가 조달하는 것으로 방침이 세워졌다.
임홍재 시장을 회장으로 한 기성회는 시민뿐만 아니라 강화, 김포, 안성, 수원 등 경기도 내 각 주요 도시에 안내장을 보내 적극적인 원조를 구했다. 100명의 신입생은 영어, 수학, 국어 시험과 면접, 신체검사 등을 치러 선발했다. 선발시험은 인천 송학동뿐만 아니라 서울 용산구 한강통운수학교에서도 진행됐다.
인천항건설사무소(중구 항동 추정)로 자리를 옮긴 인천해양대는 12월 첫 입학식을 갖고 이듬해 2월 개학했지만, 곧 난관에 봉착했다. 약속했던 전학생 기숙사 생활은 부족한 시설 탓에 지켜지지 않았다.
학생 40명 정도가 중앙동의 한 식당에서 숙박을 했고, 나머지 학생들은 서울 등지에서 기차통학을 해야 했다. 교수들도 여관을 전전해야 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진해에 있던 진해해양대(현 한국해양대의 전신)와의 갑작스러운 병합 문제까지 터졌다.
우리나라 1세대 해운전문가로 평가받는 최재수(81) 전 한국해양대 교수는 "미군정 통위부(국방부)가 해안경비대 간부요원 양성을 위해 진해 해양대 학교 건물을 비우고 나가라고 통보했다"며 "(학교는) 이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고, 들어갈 교사도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작정 상인(上仁)하게 됐다"고 했다.
가뜩이나 시설이 부족했던 인천해양대는 170명에 달하는 진해해양대 학생을 한꺼번에 떠안아야 했다. 인천시는 반대 입장을 나타냈지만, 통하지 않았다.
통위부 해안경비대 박진동 대위는 두 대학의 합병식에서 "남조선에 단 하나밖에 없는 국립해양대학으로 씩씩하게 발족했지만 교사도 없고, 교과서와 교재도 없고, 훌륭한 기숙사 시설도 없는 상황"이라며 "통위부의 굳은 방침과 인천시민들의 열렬한 원조 하에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니 학생 제군은 공부에 전념하기 바란다"고 했다(대중일보 1947년 2월 25일자).
/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