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확충 이유로 '임시 휴강'
대중일보 "존폐 위험한 기로
군산의 유치 운동 경계해야"
불리한 환경 극복 못해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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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경기지역 주민들의 후원 아래 설립된 국립 인천해양대학교는 개교 2개월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부족한 학교시설과 기숙사에 미군정의 방침으로 병합된 진해해양대 학생 170여명까지 떠안아야 했던 인천해양대는 끝내 충분한 시설과 자금을 바탕으로 해양대 유치운동을 벌이던 군산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미군정은 국립 인천해양대의 새해 예산을 3월 하순이 되도록 세우지 않는 등 대학운영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학생들은 부족한 시설 탓에 충분한 수업을 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자 미군정은 급기야 4월 15일까지 임시휴강 조치를 내렸다. 학교에 전기시설을 확충하겠다는 게 명분이었다.

대중일보는 이때 "국립 인천해양대학이 이제 존폐를 결정치 않으면 아니 될 위험한 기로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보도(1947년 3월 26일)했다. 대중일보는 군산에서 벌어지던 '인천해양대 유치운동'을 경고했다. 대중일보는 "군산의 대학유치운동이 매우 열렬하다는 걸 경계해야 한다"며 "당국이 교사와 기숙사, 기타 거액의 자금을 준비한 군산을 선택할 수도 있는 만큼, 인천시민이 크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이번 임시휴강 기간 중에 자칫하면 인천해양대를 군산에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많다"며 "인천해양대 교수들도 통위부 당국의 미온적 태도와 인천지방 인사들의 열식은 태도에 염증을 느껴 현재와 같은 상황에선 도저히 교수를 계속할 수 없다고 의견일치를 봤다"고 보도했다.

우리나라 1세대 해운전문가로 평가받는 최재수(81) 전 한국해양대학교 교수는 "군산은 일제 강점기 항만도시로서 호황을 누리던 도시였는데, 해방 후 폐항위기에 직면한 상태였다"며 "군산 활성화를 위해 해양대학을 유치하려 했다"고 했다.

이어 "미곡 창고, 일본인 주택 등 비어있는 공간이 많아 내부만 정리하면 학교 교사나 숙소를 마련할 수 있었고, 군산 행정당국의 재정지원 약속도 있어 (인천)해양대학 유치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

대중일보의 우려는 곧 현실이 됐다. 미군정은 해양대 유치운동을 벌이던 군산으로 인천해양대 이전을 결정했다. 임시 휴강기간 중이었다. 미군정은 1947년 4월 13일 중앙방송을 통해 '조선해양대학생들은 금월 15일 군산부청 제2강당으로 모이라. 만일 당일 불참하는 학생은 제명하리라'고 했다.

대중일보는 "조선해양대학은 인천해양대학의 개칭이고, 이 방송은 당국의 발표인 모양으로 인천해양대의 군산이전은 이 방송으로 확정시 된다"고 했다. 앞서 미군정 조사관으로 참여한 인천해양대의 한 교수는 군산을 찾아 조사한 뒤, '군산 측의 모든 조건이 인천에 비해 유리함으로 교수단은 군산에 이전할 것에 합의하였다'는 입장을 인천시에 전달하기도 했다.

인천시는 즉각 해양대학 인천 존치를 위한 전국적 운동을 펴기로 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인천해양대는 미군정의 외면 속에 교사와 기숙사 부족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교 2개월여 만에 인천을 떠나야 했다.

/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